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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이] 김삼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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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반응을 하게 되는 글들이나 영화를 보았을 때, 그런 매체들이 머리속에서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미지들에게 질서를 주어서 화면 혹은 활자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일련의 묘사 혹은 에피소드의 선택이 격한 감정을 일으키는 메카니즘의 한 부분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어설프게 그것을 따라해보려는 욕망이 생기기도 했었다. 창작의 욕구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분해해 하나하나 명확히 파악해서 내 상태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들을 골라낼 수 있게 인도해 주는 방법론같은 것을 얻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랄까. 가령 내 유년의 기억에서, 꿈처럼 장면과 감정이 뭉뚱거려져서 무엇을 이야기로 추려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던 차에 보게된 이명세 감독 영화 <첫사랑>에서 지붕에 버려진 종이 비행기 혹은 <M>에서 묘사된 미장원 앞길은, 감독이 자신의 기억에서 어떤 것을 추려내고 배치했는지를 나한테 설명해주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후배가 단편영화 찍는 것을 도와주고 조그만 시네마 테크에서 상영까지 마치게 된 상호는 이어서 상영된 한 단편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자극을 받게 된다. 아마 상호 역시 세상을 영화를 매개로 해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된 단편 영화일은 시작부터 고생이고 결국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독립영화쪽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대한 에피소드들과 명예보다는 좋은 작품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흑백화면에서 조용히 묘사된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술자리에서 달래고 협박하며 영화 그만 찍으라라고 소리치는 후배에게 제대로 반발도 못할정도로 자신이 재능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쪽 판을 뜨지 못하는 상호의 모습과 오랜 기간동안 익히게된 전문적인 지식과 감독이라는 감투 덕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기대하는 모습, 이 두가지 장면은 내가 공부하면서 늘 생각해 오던 주제였기때문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

[마음이 만든 것] 정필원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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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5화로 이루어진, 짧막한 단편만화를 독일에서 읽기 시작해서 한국에서 마지막 화를 보게 되었다. 첫 화의 첫번째 컷을 보았을 때 많이 익숙한 분위기라고 생각해서 단순히 다른 만화, 특히 <위대한 개츠비>의 아류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천방지축인 초등학생에게 갑자기 치마를 입히면서, 어라 머슴아가 아니었네 하는 작은 놀람과 그리고 첫 화에 마지막 장면에서 치맛속을 뽈뽈뽈 헤엄쳐 다니는 금붕어를 보면서 느꼈던 신기함이 그저 그런 작품이란 편안한 평가를 잠시 접어두게 만들었더랬다. 적은 편수만큼이나 소품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한 여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만화는 차분하게 보여준다. 첫 화에 등장한 금붕어는 동주의 초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호진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눈치를 챈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는데 마지막 화에서 상상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확인해 준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만화의 갈등해소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하기 보다는, 만화를 읽는 우리들을 계속 동주와 호진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조류독감으로 자신의 병아리들을 폐사 시키려는 공무원을 피해 트럭에 병아리를 싣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기면증에 시달리는 양계장 주인을 수배중인 살인마로 오해하는 에피소드는 참 개성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억지같은 어린이 납치범과의 실랑이때문에 바다에 빠지면서 마지막 갈등해소로 가는 장면은 매끄럽지 못 한 듯. 아빠와 동주 담임 선생님과의 로맨스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 되는 건지.  바다에 빠진 동주를 구하느라 다쳐서 병원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는 호진이 예전에 써놓은 쪽지에 있는고백을 보면서 동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엄마에게 토로하며, 엄마를 향해 숨겨왔던 그리움을 호진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바꾸게 된다. 결국 깨어난 호진에 대한 안도감, 엄마를 보내는 미안함, 그리고 새로 깨닫게 되는 낯선 감정에 북받친 동주는 병원 복도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동주는 한바탕의 소동을 통해 엄마의 기억을 내려놓고 머슴아 같...

목사가 된 전직 고문 기술자

신문 기사 를 읽다 악명 높던 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가 이번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글 바글 끓어 오르는 댓글처럼 내게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영화 <밀양>에서 희생자들의 용서없이 회개만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모든 짐을 내려놓은 납치범의 예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라는 이근안씨에게 충고도 한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근안씨의 이미지는 대개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옮겨온 것이다. 단편소설 <붉은 방>에서 임철우는 피고문자와 고문자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래도 독자는 고문에 괴로워 하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에게 감정입을 하겠지만 입시반인 자식 걱정을 하는 개신교 신자인 고문 기술자의 넋두리를 듣다 보면 그가 갖고 있는 의외의 서민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귀자의 <천마총 가는 길>에서 고문으로 망가진 주인공이, 어느날 가족과 들른 갈비집에서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두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고문자와 맞닥뜨린 상황에서, 마치 옆집 이웃을 만난듯이 대하는 그를 보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공 용의자를 짐승으로 격하시킨 후 행하는 고문들을 그들은 단순한 직업으로 여기며 자신들을 서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포악스러운 고문 기술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 그리고 자식 사랑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수배 생활로 인한 어려움과 옥중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은 아마 서민으로서 생활하던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맡아 주시니 말이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세속적 구원을 늘 바라고 있지 않던가. 누구나 어떻게서든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마음 속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싶어할 것이다. "아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라며 <행복의 나라로>에서 한대수가 ...

[콘스탄트 가드너(Constant Gardener)]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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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유약한 말단 외교관 저스틴과 정력적인 활동가 테사의 사랑은,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브라질>에서의 샘 라우리와 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특히 권력기관에 속해 있으면서 특권을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생존 경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보통의 직장인들 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두 주인공 모두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세력들과 대립을 하게 되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안쓰럽게 발버둥치는 모습들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브라질>이 블랙 유머로써 암울한 정보 통제 사회의 모습을 한 연인의 사랑 실패담을 통해 절절히 보여 주었다면 <콘스탄트 가드너>는 하드 보일드의 장르에 충실하게 한 부부의 죽음을 통해 아프리카 민중들의 모습과 제약회사들의 더러운 면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정보부(Ministry of Information)의 막강한 권력마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샘의 모습이 약간 코믹하게 그려졌다면 막강한 권력과 피도 눈물도 없는 청부업자들의 틈에서 총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채 쫓기며 두들겨 맞는 저스틴에 대한 묘사는 무기력할정도로 실제 같다.  나름대로의 요약을 한다면 영화는, 뒤늦게 깨달은 뒤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마음의 집으로 저스틴이 돌아가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아내가 살해돼 주검으로 영안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저스틴이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감정을 숨긴채 바라보던 이유는 아내가 아프리카에 입국하기 위해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했을지 모른다는 의심(Marriage of convenience)과 같이 활동하던 아놀드와의 외도 의혹에 슬픔이 묻혔기 때문일터이다. 그렇게 그는 그녀로부터 떠났지만 테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와중에, 테사의 아프리카 민중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비로소 테사가 그가 안주하고 싶은 마음속의 집임을 깨닫게 된다. 테사가 하...

당신의 지혜

한 줄에 불과할지라도 그 배경에 전혀 단순하지 않은 경험의 반복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있다. 대개 두 가지 종류의 것인데 첫 번째는 지식의 표현이고 두 번째는 지혜의 드러냄이다. 전자는 전문적인 논문에서 볼 수 있는 데 글쓴이가 오랜 시간을 거치며 반복하면서 단련한 지식의 압축이다. 후자는 흔히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에게서 자신만의 통찰을 뽑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상실감은 성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한 시인이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실감에 힘들어 할 때 딸과 함께 실크로드로 일주일 여행을 가면서 한 말이다. 그녀는 여행이 자신을 성장시킨다고 했다. 이 구절은 실크로드 길 위의 여정을 설명하는 시인의 구구 절절한 설명들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한 눈에 건져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자신이 온갖 미련에 힘들어 하면서 잃어버린 것에 집착을 할 때 어떻게서든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일들이 실상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길지는 않지만, 수개월의 경험을 이렇게 한 문장에 압축할 수 있음은 얼마나 경제적인지...... 그 간결한 문장은, 진짜 내가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하는 회의를 품을 때, 그래도 내가 해야할 일들을 일러주고 있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 정윤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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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비극을 간직한 유쾌한 인간. 테리 길리엄의 <피셔킹(Fisher King)>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피셔킹>에서 볼 수 있던 두 사람의 우정이 <슈퍼맨>에서는 안 보인다. 영화에서 송수정은 거의 관찰자에 가깝다고나 할까. 영화를 다 보고나니 수정의 남자 친구의 존재는 무슨 역할인가 궁금해졌다. 영화 끝에서 한 번이라도 등장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자칭 슈퍼맨 이현석에게 수정이 마음을 열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까?  영화 삼분의 이까지, 심지어는 이현석의 과거와 비극을 보여준 지점과 "괴물"의 등장 후 구조가 시작되기전 자신의 임무를 깨닫는 장면까지 잘 정돈된 느낌이라면 그 이후부터 영화 끝까지는 휘몰아 치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평범한 앞 부분이 아쉬웠다. 예상과는 다르게 슈퍼맨의 과거의 비극보다는 슈퍼맨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한 느낌이랄까.  가족의 비극을 보여주는 장면은 별 장치없이 바로 병원의 갱생장면과 연결돼서 중요한 부분을 왜 별 고민없이 찍었을까 의아해 했는데 아마 감독은 마지막 슈퍼맨의 활약을 더 부각 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다. <피셔킹>에서 전직 교수 페리의 비극을 보여주는 방법을 굳이 택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감정의 강약조절을 기대했었으니 그 부분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슈퍼맨이었을 때와 인간으로 돌아온 후의 대비가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만 영화 자체는 그렇게 못마땅하지 않았다. 영화의 앞과 뒤가 잘 정돈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가령 창문 아래서 아이를 안은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오는 슈퍼맨 아버지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앞 부분에서 전광판 트럭장면으로 아버지와의 교감을 한 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쉽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K-PAX의 아류작으로 치는 것은 ...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기를 묻혀 준다] Georges Rouault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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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juste, comme le bois de santal, parfume la hache qui le frappe>  Georges Rouault 작품보다 제목이 더 잘 알려진 판화일 듯 싶다. 그림 보기는 영 젬병인데다가 작품과 맞추어 볼 경험도 마땅한게 없는지라 처음 볼 때는 판화 속 상황조차도 잘 이해를 못 한채 전체적인 우울함만 눈에 띄었다. 판화를 걸어논 미술사이트에서 설명을 읽어본 후에야 죽은 이를 엄마, 딸, 그리고 날개달린 천사가 나르고 있고 네 인물들의 어깨위로 밝은 빛이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빛들이 이 판화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예수님의 빛나는 얼굴이 이들을 내려다 보고 계신다. 엄마와 딸의 비탄에 젖은 모습과는 대조적인 죽은 이의 평화로운 얼굴은 아마도 판화의 제목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엉성한 추측만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있다면 각 인물들의 상체에 비추는 빛들이 이어져 예수님의 얼굴과 만나고 있는 점이다. 이 동그란 원의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은혜로움이 모든 인물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판화를 보면 볼 수록 예수님의 얼굴이 계속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그 동안 기도 드리면서 예수님의 이미지가 너무 막연했었는데 눈을 감고 떠올릴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 하나를 찾은 듯 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권혁웅 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 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 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어렸을 적 키우던 강아지가 며칠을 낑낑대며 앓다가 죽은 이유가 꼬맹이들이 던져준 풍선 쪼가리들을 과자로 착각해 덤벼들었기 때문인 것을 알았을 때 녀석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집 앞 둔덕에 모종삽으로 강아지를 묻어준 자리가 잡풀로 덮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내 화는 오래가지 않았더랬다. 어릴 때 겪었던 죽음은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땅속에 묻혀 풀들의 거름이 되던, 길바닥에 버려져 구더기가 끓는 흉물이 되던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평온한 모습을 띠게 되었더랬다. 하지만 요즈음 내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그리고 주변 아는 분들에게서 듣는 죽음들앞에서 나는 더이상 그러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기 힘들게 됐다. 죽음은 편안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홀연히 퇴장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간다.    돼지가 너무 안 됐다. ...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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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가 세상의 사람들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로써 쓰이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굳이 다른 노력을 할 필요없이 나의 위치가 정해지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나의 것의 위계를 정해 주는 것은 종종 박사 학위의 힘이었다. 하지만 활기차게 움직이지 않는, 딱딱하게 굳은 지식을 주렁 주렁 머릿속에 넣은 채 사람들 속에서 행세할 때 반드시 느낄 수 밖에 없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허영이 아닐까-은 자의식 과잉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허영과 본래 모습에서 고민하다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하는 고백을- 박사 별거 아녜요-사람들은 으레 하는 말로 흘려 들을 것이고, 당사자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고백에 안도하며 다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물론 약간의 면죄부를 얻은 채 말이다. 세상에 다양하게 보이는 위선의 모습 중에 지식인의 것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들의 학식 속에 깃들어 있을것이라 믿어지는 사리판단의 능력이 실상 여느 사람의 것과 같거나 심지어는 더 처짐에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식의 체계로 그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의 한 방편인 허영이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루를 하는일 없이 보내는 국문학 시간 강사 윤주에겐 아파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고욕이다.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을 그는 경멸하고, 강아지 주인들이 몰상식함을 믿는 그의 확신은 강아지를 죽이는 자신의 합리화로 이어진다. 새벽에 방송국이라고 장난 치는 전화에 긴장하고 나갈 준비까지 할 정도로 순진한 관리 사무소 경리직원 현남은, 강도를 물리친 새마을 금고 여직원의 활약상과 텔레비전 출연을 동경하고 있다. 어느 날 누군가 아파트 옥상에서 개를 던지는 경악할 장면을 ...

[화려한 휴가] 김지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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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개인의 트라우마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혹은 은유나 비유가 아닌, 본격적으로 80년 광주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광주 항쟁 혹은 학살에 대한 이미지는, 대학시절 읽던 임철우씨의 단편 소설들에서 묘사된,  광주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강박증처럼 새긴 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에서 처음 느끼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여러 분야-<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등등-에서 그려진 광주의 모습들은 여전히 본격적인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의 부채를 털어버리듯이 임철우씨가 써 내려갔던 장편 소설 <봄날>로 그날을 세세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봄날>을 읽으면서 몸서리 쳤던 기억들과 분노, 슬픔들은 느낌이 많이 바랬지만, 아직도 그 날들을 보는 시선들이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의 모습들을 보면, 소설을 읽던 당시 맘속에 가지고 있던 적의가 다시 살아나려 한다.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화려한 휴가>를 그동안 보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봄날>의 경험으로 인해 영화 자체에 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영화 자체가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우선 나를 끌어당길 그 소재자체는 소설에서 충분히 봤으니 말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과도한 신파와 어설픈 코미디였다. 소재 자체를 상업적인 틀에서 영화화하는 것은 반대할 것이 없지만 그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에 통했을 거라고 믿는 구태의연한 영화적 장치를 그대로 써먹으면서 소재를 우려먹는다는 생각이 드니 영화 자체가 그닥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를 두 번에 나눠서 봤다. 진압 작전이 시작되기 전, 여러 인물들이 소개되고 민우와 신애가 감정을 쌓아가는 영화 삼분의 일은 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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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40년을 근무한 보험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한 기품있는 슈미트씨는 무료하게 지내던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아프리카 기아 소년 후원 프로그램을 보고 전화를 하게 된다. 며칠뒤 날아온 지원 서류에는 엔두구라는 아프리카의 한 소년에 대한 소개가 있었고 후원자로서, 수양 아버지로서 슈미트씨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의 누구와도 연관이 없는 엔두구에게 쓰는 편지에는 일상적인 자신에 대한 소개로 시작했지만 이내 그 동안 참고 있었던 그의 속내가 드러나게 된다. 퇴직 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풋내기에 대한 경멸, 도대체 왜 같이 살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아내,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의 딸,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딸을 데려가려는 영 못마땅한 사윗감.  갑자기 아내와 사별을 하게 되고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어느날 결심을 하게 된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찾아가 도와주기로 한 것. 하지만 딸의 매몰찬 거절에 방향을 틀어 자신의 인생에 중요했던 곳들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지금은 타이어 판매점인 그가 태어난 곳과 대학 시절의 동아리 등등.....  결혼식 전날에 도착해 사돈집을 둘러 봤을 때 실망을 한 그는 딸의 결혼을 말리기로 하고, 열심히 설득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결혼 준비때문에 스트레스 가득한 딸의 분노뿐이었다. 결국 그는 체념하고 피로연에서 사돈댁 식구들을 축복하며 딸이 얼마나 좋은 집에 시집을 가는지 맘에 없는 연설을 하게 된다.  길 위에서 RV차를 몰고 이곳 저곳 방문할 때 슈미트씨는 늘 엔두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딸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그는 엔두구에게 하소연한다. 이제 그는 세상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내의 죽음 후 아무 의욕도 남지 않았던 그에게 활력을 주었던 것은 딸의 잘못된 결혼을 말리려는 시도이었지만 실패했다. 큰 상실감을 안고 오마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스카우트] 김현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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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의 눈빛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 고통스런 경험이다. 더 가슴 무너지는 일은, 그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당사자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과거로 물러나 버린 그 상황은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주지 않은 채 그 당시 마땅히 취했어야 할 말과 행동들이 고스란히 부채의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고기집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자신의 흉칙한 모습을 쳐다보는 세영의 당황스러운 눈빛을 결국은 깨닫게 된 호창의 모습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안절부절 못 하며 몸이 아닌, 맘의 상처를 온전히 얼굴에 드러내 보이는 임창정의 연기는, 늘 그렇듯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감독이 담고자 했던 좌절감과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영화를 보고 있는 내게 전해주었다.  <비트>에서 처음으로 임창정의 양아치 연기를 봤을 때, 그리고 모두들 그의 연기력을 칭찬할 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건들거리는 저 모습에서 뭐 연기로 끌어낼 것이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출연했던 영화와 다른 한국영화들을 비교해 보면 캐릭터와 감정을 살리면서, 우리 옆의 형이나 동생같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영화의 부흥기는 어떤 면에서는, 관객의 정서를 온전히 살리면서 영화에서 살아 숨쉬는 임창정, 송강호같은 배우들의 출현과 함께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석 감독은 나랑 비슷한 연배일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맞을 것이다. <광식이 동생 광태>를 봤을 때 영화의 감수성이 우리 시절의 것이니 말이다. 영화에서 묘사된 야구와 광주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과 광주의 비극이 어디까지나 배경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덮어버리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 될 것이다.  프로파간다 영화 혹은 시대극을 찍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 자체가, 보여주고자 했던 소재에 묻혀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예전에 ...

[Un après-midi 어느 오후] 반젤리스 곡, 줄리안 로이드 웨버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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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 après-midi> 반젤리스 곡, 줄리안 로이드 웨버 연주  반젤리스와 줄리안 로이드 웨버가  연주한 곡 의 제목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희한하게도 아무런 날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중학교 말 혹은 고등학교 초였던 것 같다. 초 여름날 창을 통해 비치는 햇볕으로 방 한구석이 환한 가운데 나는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챙겨보고 있던 중계니 청룡의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었을 테고 아마 상대편은 해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태의 투수는 전형적인 잠수함인 방수원. 언더핸드 투수에다가 구속까지 느려, 별 일없이 공수를 주고 받는 경기를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느릿느릿 진행됐다. 밖에서 왁자지껄 놀던 아이들도, 더위에 적막감이 도는 골목만을 남긴 채 사라져, 간혹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가끔 하늘을 지나가는 제트기 소리 뿐이었다. 방 바닥을 비스듬히 비추는 햇볕이 만드는, 환하고 따듯한 사각형 옆에 누워 머리를 팔에 기댄 채, 먼 곳에서 나즈막하게 퍼지는 제트기 소리와 맥이 풀린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을 들으며, 천천히 홈플레이트로 기어가는 야구공을 쳐다 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나른한 기운이 온 방안을 덮기 시작했고, 나는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들이 내 위로 천천히 내려앉아, 나를 푹신한 이불로 덮어주던 느낌이랄 수 있는 그런 경험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속도를 늦추며 흘러가던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반젤리스의 신디사이저와 줄리안 로이드 웨버의 첼로 소리가 어울리며, 라디오에서 흘러 나올 때 참 재밌더랬다. 아무 일도 없었던 나른한 '어느 오후'의 경험이, 정리할 수 없던 그 느낌이 곡안에 고스란히 패키지처럼 담겨있었으니깐 말이다.

[해프닝(The Happening)] 나이트 샤말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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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의 습격을 보여준 사인에서 영화의 긴장을 주는 중요한 장면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이방인의 모습을 얼핏 보여준 것이다. 조금씩 긴장감을 죄어오는 그 이야기의 구성은 마지막 주인공의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했다.  이번에는 자연의 역습이라는 진부한 주제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지 아는 듯하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화면은 편집을 통한 어떤 암시도 없이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머리핀으로 서슴없이 목을 찌르는 장면과 공사장 인부들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예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집단 자살이라는 큰 사건이외에 영화의 세부를 채워주는 인물들간의 이야기가 부족한 것이 아마 영화의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공존, 혹은 반목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닌 곳에서, 충격적으로 만나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기대한 반전이 나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영화의 진부한 메세지에 좀 질려하는 듯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의 중, 단편집의 제목이다.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장르는 에스에프이다. 아마도 제목을 보고 흥미를 가졌을 독자들은 책의 내용이 자신의 기대와 사뭇 다른 것을 보고 처음에는 실망을 하겠지만 곧 만만치 않은 이야기거리를 보고 맘이 돌아설 것이다. 아무려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다. 원래의 영어 제목은 stories of your life, 책에 포함된 중편의 제목을 따왔다. 여기서 화자는 어머니이고 말하는 대상은 딸임을 염두에 두면 적당한 번역은 네 인생의 이야기(실제 중편에 쓰인 제목) 혹은 네 삶의 얘기들 정도일텐데 막상 형식적인 번역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내가 처음 제목을 봤을 때도 그랬다. 내 인생의 이야기라니. 내가 겪은 경험들을 대표하는 어떤 원형들이 존재해서 그것들만을 모아놓은 책, 이런 분위기가 묻어있는 제목이었다. 그 책을 들춰보면 나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모든 기억들의 정수들이 보존되어 있을 터였다. 마치 '혈액형별 성격', 혹은 '오늘의 운세'의 문학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장편소설도 아니고 중, 단편집이니 더욱 그러한 기대를 갖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머릿속에 장치를 심어 일생을 몽땅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었지만 그 기록마저도 편집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의 삶중에는 의미있는 있는 때 혹은 경험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장면들이 다른 것 보다 더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를 댈 수 없는 나는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 잡아두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남다른 빛깔을 띄는 그런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고 당시에는 그냥 휙 지나가 버린다. 정류장에 내린 후에도 버스 좌석 밑에 쓰러져 있는 우산을 떠올리지 못한 채 무언가 빠뜨린듯한 허전함을 느끼듯이 말이다.  아쉽게도 내 기억을 친절하게 정리...

신앙생활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 벌써 사오년 되었다. 기간이 확실치 않은 이유는 그 시작을 찾기 어렵게 자연스러운 친교 활동을 통해 종교를 접했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현재의 고통을 통해 종교에 입문하게 된 이들의 것과 다른 점은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미국의 꽤 큰 한인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자잘한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들이 나의 신앙관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볼 거리를 주지는 않았다. 단편적인 성경 혹은 기독교의 지식을 배울 뿐 왜 신앙을 가지려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독일로 들고 들어 온 종교 철학에 관련 된 입문서를 읽은 후 나 자신의 신앙관을 정리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일생동안 내 안에 구축된 과학적인 세계관은 신앙과 어떻게 조화 시켜야 하는가, 하는 물음도 있었다.  우선 종교적 세계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인 종교적 경험 혹은 계시 체험 그런 것들이 나에겐 (아직까지는) 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믿음이란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회의가 들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점은, 앞에서 언급된 신은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범신론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즉 과학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와중에 심리적으로 자연히 기울게 될 수 있는 자연 그 자체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처음에 하나님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는 모든 자연과 현상을 아우르며 법칙을 주관하시는 그런 존재, 즉 앞의 과학자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공동체에 참여해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나 자신 삶의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종교적 헌신으로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삶의 한 목표로써 추구할 만한 이상이었다...

[촛불을 든 천문학자] Gerrit Dou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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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tronomer by Candlelight> Gerrit Dou 미국 로스엔절레스에 있는 게티(Getty) 미술관에 갔을 때 나의 눈을 사로 잡은 그림이다. 밤에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스탠드의 불빛에서 눈길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그림처럼 물건들의 윤곽이 어슴프레 드러났더랬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내겐 학문의 낭만 같은 것이 있었다. 주변과 담을 쌓은 채 적막감속에서 책을 읽으며 기쁨을 찾는 중세 학자들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계산을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지가 바뀌었다. 수학뿐 아니라 어떤 학문을 하던지 어느 수준부터는 믿고 의지할 사람은 자신뿐이란 것을 깨닫는 시간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진도가 안나가는 논문을 붙들고 한숨 짓고 있을때였다. 그 때 외로움이 예전의 이미지에 덧칠이 되었다. 책갈피용으로 파는 조그만 복사본을 사서 조교실 문 앞에 붙여 놓았더랬다. 책상에 앉아 있다 잠깐 고개를 들어 보면 그림은 언제나 두가지 감정을 번갈아 환기 시켜주었다. 낭만과 외로움. 그림에는 두 감정들이 묘사되어 있었고 어둠속에서 촛불의 빛에 드러난 실루엣들은 그것들을 꾸며주는 장식들처럼 보였다.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나의 인상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받게된 인상은 프랑스 철학에서 오용되고 있다고 비난받는 과학 용어들이 실제로 과학에서 쓰는 용도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전에 디씨에서 오갔던 설전에서 도올이 엔트로피의 개념을 이상한 맥락에서 쓴다는 비판과 거의 비슷한 경우 같다.  생명 현상이 다른 어떤 물리 현상과 다름을 주장하기 위해 도올이 엔트로피를 가져다 이야기 한 듯 싶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명 현상을 철학적인 틀에서 이해를 하려 했던 것이고 엔트로피는 그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예중의 하나로 끌어다 쓴 것일게다. 그가 주장하던 형이상학의 개념은 생명 현상을 포함하는 큰 범주였던 듯 싶고 화이트헤드쪽으로도 책을 번역하셨으니 유기체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상황이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과학의 커다란 성공은 일종의 권위를 획득했고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권위에 눌려서 관심을 돌리거나 혹은 다른 권위, 즉 종교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는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일들. 두번째는 비전문가이지만 전문적 연구의 경험을 가지며 이로인해 권위에 대한 굴복 보다는 자신만의 이해를 도모하는 인문학의 연구자들. 세번째는 사회적인 영향력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영향력으로 과학의 권위를 인식하며 과학 연구에 몸담고 있는 당사자들.  두번째의 경우가 지금 생각해 봐야 할 경우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필요하지 않은 곳에 과학의 개념들을 가져다 쓸까? 가령 크리스테바가 시를 설명하기 위해 집합론을 언급한 것 처럼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수학의 명징성(혹은 권위)을 빌리기 위해. 두번째는 어떤 도구보다도 수학적 개념 혹은 단어가 적확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즉 비평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로써의 유용함이다. 비호의적인 추측을 하나 더하자면 그냥 뭔가 있어 보이려 가져가 쓴다는 것이다. 사실 별로 도움이 되는 추측은 아니다. 생산적이 논의를 위해서라...

[미스 리틀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 조너선 데이턴, 밸러리 패리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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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지막 장면에 아들 드웨인이 삼촌의 위로를 받으며 뱉은 말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한다. "세상은 지랄같은 미인대회의 연속이에요. 초등학교, 고등학교.... 젠장맞을 항공학교...." 그 대회가 어떤 것인지 영화에서는 똑똑히 보여준다.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 참가자들의 치장들을, 도저히 꼬맹이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래서 올리브 아빠마저 턱을 떨어뜨리고 얼빠진 듯이 관람할 수밖에없는 장기자랑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아이들의 대회가 아니라 단순히 다른 체급의 미스 선샤인을 뽑는 것처럼 보인다. 올리브는 패배자(Loser)가 되기에는 예쁘고 너무 어리다. 아마 성공지향적인 아빠의 생각에도 너무나 딱 맞춘 꼬맹이 미인 후보들이 거부감이 들었을게다. 사실 그가 그렇게 팔고 싶어했던 아홉단계 성공이론 역시 정형화된 성공의 모습을 전제로 했던 것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끝나면 가족들은 각자의 경험을 얻게 될 것이고 아빠 역시 자신의 성공 이론을 다시 검토해 볼것이다.. 영화를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카피 <콩가루 루저 가족 이야기>는 상투적이지만 진짜 딱 들어 맞는다. 하지만 여기서 실패란 무능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이목을 끄는 화려함으로 치장된--이런 의미에서 정형화된--성공의 반대말이다. 너른 성공의 스펙트럼에서 단지 조그만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런 성공의 개념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 미디어의 영향이 클 것이다. 정형화된 미인의 모습은 안성맞춤의 예가 될 것이다. 콩가루 가족을 거의 천마일을 달려가게 만든 것은 그들의 사랑스런 손녀이며 딸이고 조카이자 동생인 올리브이다. 마지막의 단체 춤 장면을 빼면 그들을 생기가 도는 가족으로 만드는 경험은 함께 고장난 차를 밀어 시동을 걸고 달리는 차를 좇아 아슬아슬하게 타는 스릴을 느꼈던 장면이다. 똥차를 끌고 왔다 갔다 하면서 후버 가족은 한가지 물음이 떠올랐을게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성공밖에도 우리들에게 만족을 주는 성공의 모습이 있으며 혹...

[매그놀리아(Magnolia)]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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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There will be blood를 보고 택한 영화였다. 이 감독에게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폴 앤더슨 감독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굉장히 인상깊게 찍는다. There will be blood의 인상적인 갱도와 볼링장 장면은 매그놀리아의 재기 넘치는 구성을 넘어서서 관객들이 감독의 원숙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이드웨이와 마찬가지로 끝 장면의 여운이 많이 남았다. 긴 영화였고 중간에 따라가기 힘든 부분-폐암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장면들-도 있었지만 공감을 하게 되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특히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며 사랑의 감정을 삭히고만 있는 인물들을 볼 때 많이 집중을 했다. 특히 짐과 클라우디아의 이야기는 인상깊다. 아픈 과거때문에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믿는 여자가 마침내 그동안 마땅히 필요했던 위로와 사랑의 가능성을 동시에 얻게 된다는 이야기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제대로 묘사된 감정들은 영화에서 얻을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영화 처음부터 삶에 끼어드는 우연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우연을 통해서 엮게 될거란 짐작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짐작이 영화 초반의 힌트에 얽매여서 대개 이름 사이의 연관성, 너른 시공간에서 교차하게 되는 희박한 확률등등... 이런 것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는 뜬금없이 하늘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개구리들이 수없이 떨어지면서 의미없이 지나쳤을 인물들을 만나게 한다. 시한부 인생의 퀴즈 쇼 진행자의 자살을 방해하면서 일종의 응징의 성격을 보여주고, 사랑에 대한 희망을 잃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서로에게 필요한 조언을 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엄마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딸을 위해 차를 돌리고, 딸은 마침내 엄마와 만나게 된다. 퀴즈쇼를 중간에 뛰쳐나온 소년에게는 아마도 퀴즈문제로 알고 있었을 개구리비를 직접 겪게 되는 흔치않은 경험일 것이다.  모든 ...

[There will be blood]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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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돈과 창조 영화의 첫 장면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에서 영화 시작전 검은 화면위로 흐르던 불협화음을 통해 창조 이전의 혼돈을 표현했던 전주곡을 떠오르게 한다. 대사없이 이어지는 처음 십몇분간의 장면은 주인공의 고난과 외로움을 너무나 절절히 전해주어서 주인공의 독백이 저음으로 시작될 때까지를 한 부분으로 떼어내도 괜찮았을터였다. 이 부분은 개인버전의 창조신화라고 할 수도 있을것 같다.  선데이힐에서 주인공 다니엘은 성공의 단초를 찾게 되지만 또한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의 라이벌이 될 일라이를 만나게 된다. 성공적인 시추와 함께 종교지도자 일라이 역시 자신의 제삼계시 교회의 크기를 불려 나간다. 하지만 형과는 너무 다른 일라이를 다니엘은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일라이 또한 약속했던 돈 그리고 시추기계의 축도 기회를 주지않는 다니엘이 못 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대결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기어코 돈 달라 조르러 갔다가 얻어 맞은 뺨을 세례의 핑계로 그대로 돌려줘 복수하는 일라이의 모습을 보니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권투대결이라고 했던 감독의 얘기가 떠오른다. 다니엘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시추공의 기도를 부탁하러 방문했던 교회에서 일라이가 행하는 치유의식을 본 후 의구심을 갖게 된다. 자신이 보는 일라이의 본래 모습을 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가? 인간 심성 아래에 묻힌 욕망을 까밝힘은 석유 시추의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다. 땅을 연구하면서 석유를 품은 곳을 찾는데 실패가 없었던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확신한다. 저 놈을 시추하면 아래에 감춰져 있던 사악함이 터져 나올 것을.... 일라이가 선교를 위해 떠날 때 역에서 쳐다보면서 궁리했던 것이 그것아닐까?  영화에서 석유와 피는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마지막 장면의 피는 거의 검게 처리 되었다. 마치 석유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생이라고 믿었던 사기꾼을 죽인 후 파묻는 무덤은 석유로 가득차 있다. 석유가 세상 욕망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코엔형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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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감상평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영화에 음악이 안 나왔다는 점이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던 장면들이 거의 연출과 연기에 의해서였다니 무척 신기하다.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음악이 없었슴을 눈치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영화 보는 내내 '파고'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도입부에 평범한 눈 길을 보여주던 화면 위로 절절하게 흐르던 주제음악이 영화 전체를 떠다니고 있었다. 오도방정떨지 않으면서 이곳 저곳 탐문수사를 벌이던 주인공의 무심해 보이던 눈빛과 한 가족의 어이없는 파탄, 코미디와 비극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 간격만큼이나 넓은 절절함이 마지막에 남았다. 그동안 '노인'을 보면서 나의 이해를 겉 돌던 영화의 감수성은 '파고'에서 거의 관찰자로서 머물면서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 좇고 쫓기는 자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 도저히 영화의 끝을 못 참을터이다. 하지만 잠깐 비켜나 그 동안 축적된 지혜의 눈으로-내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본다면 무시무시한 폭력앞에서 버티다 우연하게 퇴장하는 인생이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물며 그 안타까움을 오랫동안 겪어오면서 기억에 각인했을 노인들이라면 더욱 더 말이다. 마지막 문장을 기계적으로 해석해서 약간의 비약이 되는 비유를 한 번 시도해 보자. 어려운 생활 속에서 힘들지만 꿋꿋하게 살아가고 또 어느 순간 조그만 성공도 거두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가 행복한 결말보다는, 아니 어떤 모습이던지 끝장을 보지 못한 채 한 순간에 인생에서 퇴장해서 모든 노력이 무가 돼버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가 있다. 뭐 뉴스를 보면서 늘 불평하던 주제였으니깐..... 하지만 '노인'에서는 주인공의 허무한 퇴장에 우리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영화 안에서 가졌던 그런 불행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을 왜 우리의 삶에서는 갖고 있지 않을까? 위의 비유는 많이 비약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