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 벌써 사오년 되었다. 기간이 확실치 않은 이유는 그 시작을 찾기 어렵게 자연스러운 친교 활동을 통해 종교를 접했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현재의 고통을 통해 종교에 입문하게 된 이들의 것과 다른 점은 거기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미국의 꽤 큰 한인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자잘한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들이 나의 신앙관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볼 거리를 주지는 않았다. 단편적인 성경 혹은 기독교의 지식을 배울 뿐 왜 신앙을 가지려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독일로 들고 들어 온 종교 철학에 관련 된 입문서를 읽은 후 나 자신의 신앙관을 정리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일생동안 내 안에 구축된 과학적인 세계관은 신앙과 어떻게 조화 시켜야 하는가, 하는 물음도 있었다.
우선 종교적 세계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인 종교적 경험 혹은 계시 체험 그런 것들이 나에겐 (아직까지는) 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믿음이란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회의가 들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점은, 앞에서 언급된 신은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범신론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즉 과학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와중에 심리적으로 자연히 기울게 될 수 있는 자연 그 자체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처음에 하나님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는 모든 자연과 현상을 아우르며 법칙을 주관하시는 그런 존재, 즉 앞의 과학자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공동체에 참여해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나 자신 삶의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종교적 헌신으로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삶의 한 목표로써 추구할 만한 이상이었다. 여러 모습의 사회생활 중 교회 안에서 공동체 생활하는 것을 굳이 택했던 이유는 친교를 통한 친숙함과 함께 그런 사람들의 헌신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의 신앙에는 원래의 하나님을 향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틈나는 대로 혹은 식사 때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에게 주위의 분들과 나의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이러한 유신론적인 신앙관과 기존의 것이 양립할 수 있을까? 종교적 체험이 없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졸업 논문과 힘들게 사투를 벌일 때 우리 집 창문 바로 앞에 둥지를 틀었던 벌새에게서 나는 일종의 계시를 볼 수 있었다. 그 상황을 종교적인 체험으로 끌어올릴 만한 영성이 없었던 탓인지 대개 삶에서 얻게 되는 (예술의) 은유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말았더랬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불안감에 힘겨워하다가 잠시 내다본 창밖에 조그만 알을 담고 있던 벌새 둥지를 발견했을 때, 피폐한 내 모습과 조그맣고 하얀 알, 불안과 희망, 그 둘이 같은 때, 같은 공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했었더랬다. 그 이후로 목사님의 설교와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불확실하게 내 맘에 흘러다니던 이미지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맘 속의 슬픔과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어떻게서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이미지였다.
모든 혼란스러움이 잠잠해지는 평온한 상태.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방법이 어떻게 되었던 구원의 결과중 하나는 혼돈의 부재로써 얻는 평화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태워서 얻으려 했던 것이 결국은 구원 아니었을까. 성경에 언급된 혼돈을 몰아내시는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창조의 섭리로써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내 인생의 모티브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설득력있는 구원에 대한 은유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결국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한 구원-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구원과는 다른-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것 같다. 영화 <밀양>에서 넋을 잃고 예배당에서 꺼이꺼이 울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던 주인공의 예에서 고통을 조금 (많이) 덜어내면 나의 경우가 될 것이다.
우선 종교적 세계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인 종교적 경험 혹은 계시 체험 그런 것들이 나에겐 (아직까지는) 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믿음이란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회의가 들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점은, 앞에서 언급된 신은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범신론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즉 과학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와중에 심리적으로 자연히 기울게 될 수 있는 자연 그 자체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처음에 하나님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는 모든 자연과 현상을 아우르며 법칙을 주관하시는 그런 존재, 즉 앞의 과학자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공동체에 참여해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나 자신 삶의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종교적 헌신으로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삶의 한 목표로써 추구할 만한 이상이었다. 여러 모습의 사회생활 중 교회 안에서 공동체 생활하는 것을 굳이 택했던 이유는 친교를 통한 친숙함과 함께 그런 사람들의 헌신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의 신앙에는 원래의 하나님을 향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틈나는 대로 혹은 식사 때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에게 주위의 분들과 나의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이러한 유신론적인 신앙관과 기존의 것이 양립할 수 있을까? 종교적 체험이 없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졸업 논문과 힘들게 사투를 벌일 때 우리 집 창문 바로 앞에 둥지를 틀었던 벌새에게서 나는 일종의 계시를 볼 수 있었다. 그 상황을 종교적인 체험으로 끌어올릴 만한 영성이 없었던 탓인지 대개 삶에서 얻게 되는 (예술의) 은유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말았더랬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불안감에 힘겨워하다가 잠시 내다본 창밖에 조그만 알을 담고 있던 벌새 둥지를 발견했을 때, 피폐한 내 모습과 조그맣고 하얀 알, 불안과 희망, 그 둘이 같은 때, 같은 공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했었더랬다. 그 이후로 목사님의 설교와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불확실하게 내 맘에 흘러다니던 이미지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맘 속의 슬픔과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어떻게서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이미지였다.
모든 혼란스러움이 잠잠해지는 평온한 상태.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방법이 어떻게 되었던 구원의 결과중 하나는 혼돈의 부재로써 얻는 평화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태워서 얻으려 했던 것이 결국은 구원 아니었을까. 성경에 언급된 혼돈을 몰아내시는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창조의 섭리로써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내 인생의 모티브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설득력있는 구원에 대한 은유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결국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한 구원-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구원과는 다른-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것 같다. 영화 <밀양>에서 넋을 잃고 예배당에서 꺼이꺼이 울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던 주인공의 예에서 고통을 조금 (많이) 덜어내면 나의 경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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