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will be blood]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1. 혼돈과 창조

영화의 첫 장면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에서 영화 시작전 검은 화면위로 흐르던 불협화음을 통해 창조 이전의 혼돈을 표현했던 전주곡을 떠오르게 한다. 대사없이 이어지는 처음 십몇분간의 장면은 주인공의 고난과 외로움을 너무나 절절히 전해주어서 주인공의 독백이 저음으로 시작될 때까지를 한 부분으로 떼어내도 괜찮았을터였다. 이 부분은 개인버전의 창조신화라고 할 수도 있을것 같다. 

선데이힐에서 주인공 다니엘은 성공의 단초를 찾게 되지만 또한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의 라이벌이 될 일라이를 만나게 된다. 성공적인 시추와 함께 종교지도자 일라이 역시 자신의 제삼계시 교회의 크기를 불려 나간다. 하지만 형과는 너무 다른 일라이를 다니엘은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일라이 또한 약속했던 돈 그리고 시추기계의 축도 기회를 주지않는 다니엘이 못 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대결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기어코 돈 달라 조르러 갔다가 얻어 맞은 뺨을 세례의 핑계로 그대로 돌려줘 복수하는 일라이의 모습을 보니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권투대결이라고 했던 감독의 얘기가 떠오른다.

다니엘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시추공의 기도를 부탁하러 방문했던 교회에서 일라이가 행하는 치유의식을 본 후 의구심을 갖게 된다. 자신이 보는 일라이의 본래 모습을 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가? 인간 심성 아래에 묻힌 욕망을 까밝힘은 석유 시추의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다. 땅을 연구하면서 석유를 품은 곳을 찾는데 실패가 없었던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확신한다. 저 놈을 시추하면 아래에 감춰져 있던 사악함이 터져 나올 것을.... 일라이가 선교를 위해 떠날 때 역에서 쳐다보면서 궁리했던 것이 그것아닐까? 

영화에서 석유와 피는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마지막 장면의 피는 거의 검게 처리 되었다. 마치 석유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생이라고 믿었던 사기꾼을 죽인 후 파묻는 무덤은 석유로 가득차 있다. 석유가 세상 욕망의 상징으로써 나타난다면 (어두운)피는 인간의 욕망과 사악함의 표현일 것이다. 흔히 사물을 다루는데 성공해서 얻었던 지혜가 추상적인 대상을 다루면서도 잘 적용됨을 알게되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 장인은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하지만 통찰력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저곳에서 석유가 나올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측들은 훗날 일라이에게서 피를 볼 것이라는 계시로 발전한다.

시간이 흐른 후 일라이가 찾아온다.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다니엘은 자신의 머리를 몇 대 후려치면서까지 정신을 차린 후 차분히 일라이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자신과 하나님마저 부정하면서까지 욕망을 좇는 일라이의 추악함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니엘 일생의 시추작업은 절정에 다른다. 자신이 제삼의 계시이며 선택받은 자임을 부르짖으며 목제 볼링핀으로 일라이의 머리를 으깨어 피를 드러낸다.

"다 마쳤어(I'm finished)."

집사에게 말하는 저 대사에 두 개의 의미가 겹친다. 자신의 인생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일생의 숙원을 마쳤음을 말하는 것이다 . 너저분한 기름의 모습을 띤 혼돈에서 어두운 빨간 피의 모습으로 이미지가 옮겨간다. 영화 시작에서 흐르던 혼돈의 음악은 명쾌하고 깔끔한 바이올린으로 맺음된다.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 III. Allegro giocoso> Johannes Brahms

2. 외로움과 가족

한 편으로는 주인공의 외로운 역사가 가슴에 맺힌다. 외로움의 감수성이 영화 초반부터 첫 대사까지 나의 오감을 사로잡고 있었다.영화를 나중에 다시 봤을 때는 첫 장면의 곡괭이질마다 튀는 불꽃들이 나에게 이미지를 하나 하나 떠오르게 하였다. 천둥소리 들리는 먹구름 아래 바람 부는 벌판에 망연히 앉아 홀로 커피를 마시던 다니엘의 모습. 보호자를 잃고 요람 속에서 다니엘을 빤히 쳐다 보던 젖먹이. 아들의 귀 또는 세상과의 소통의 창과 바꾼셈이 돼버린 훨훨 타오르는 실질적인 '첫번째' 유전. 아들을 멕시코로 보낸 후 떠올리는 어린 아들과의 추억.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전의 작품에서 특이한 가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부기 나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완성된 유사 가족의 모습에 정착한 등장 인물들의 모습은 가족의 구성 요건이 꼭 피일 이유는 없음을 기묘하게 보여준다. 평생 제대로 된 혈육이나 반려자를 가지지 못했지만 다니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처음 떠오르는 것은 세례의 이미지다. 실질적인 가족인 양아들은 어렸을 적에 기름으로 축복을 받는 모습을 적어도 은유적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을 속인 가짜 동생과 사돈(Brother!)으로 맺어진 일라이다.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주인공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들은 석유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단지 탐하기만 했던 이들이다. 일종의 불경, 신성모독(Blasphemy)인 셈이다. 

외로움과 성공은 한 의자를 차지하려는 두 사람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낸다. 여기서 아들의 존재가 그 다툼의 중재자라고 추측할 수 있다. 성공 일로를 달릴 때 그의 외로움은 석유 시추에 대한 집착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못한 채 양아들만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그마저도 귀를 다쳐 그와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성공한 석유 재벌은 더 이상의 성공을 꿈꾸지 못하고 문서에 사인하는 것과 집기를 총으로 때려 부수는 것으로 일상을 보낸다. 결국은 떠나는 아들에게 퍼붓던 저주의 메아리는 그대로 다니엘에게 돌아가 그의 홀로됨을 온전히 환기시켜준다. 어두운 갱도에서 어두운 거실로 그의 외로움이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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