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나의 인상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받게된 인상은 프랑스 철학에서 오용되고 있다고 비난받는 과학 용어들이 실제로 과학에서 쓰는 용도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전에 디씨에서 오갔던 설전에서 도올이 엔트로피의 개념을 이상한 맥락에서 쓴다는 비판과 거의 비슷한 경우 같다. 

생명 현상이 다른 어떤 물리 현상과 다름을 주장하기 위해 도올이 엔트로피를 가져다 이야기 한 듯 싶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명 현상을 철학적인 틀에서 이해를 하려 했던 것이고 엔트로피는 그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예중의 하나로 끌어다 쓴 것일게다. 그가 주장하던 형이상학의 개념은 생명 현상을 포함하는 큰 범주였던 듯 싶고 화이트헤드쪽으로도 책을 번역하셨으니 유기체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상황이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과학의 커다란 성공은 일종의 권위를 획득했고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권위에 눌려서 관심을 돌리거나 혹은 다른 권위, 즉 종교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는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일들. 두번째는 비전문가이지만 전문적 연구의 경험을 가지며 이로인해 권위에 대한 굴복 보다는 자신만의 이해를 도모하는 인문학의 연구자들. 세번째는 사회적인 영향력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영향력으로 과학의 권위를 인식하며 과학 연구에 몸담고 있는 당사자들. 

두번째의 경우가 지금 생각해 봐야 할 경우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필요하지 않은 곳에 과학의 개념들을 가져다 쓸까? 가령 크리스테바가 시를 설명하기 위해 집합론을 언급한 것 처럼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수학의 명징성(혹은 권위)을 빌리기 위해. 두번째는 어떤 도구보다도 수학적 개념 혹은 단어가 적확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즉 비평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로써의 유용함이다. 비호의적인 추측을 하나 더하자면 그냥 뭔가 있어 보이려 가져가 쓴다는 것이다. 사실 별로 도움이 되는 추측은 아니다. 생산적이 논의를 위해서라면 더욱 말이다.

수학의 확실성은 공리에 바탕을 둔 일련의 엄밀한 연역적 추론으로 설명된다. 크리스테바의 글들이 칸트의 책에 나오는 것 처럼 긴 논증들 후에 증명 끝이라고 붙이면서 써나가는 딱딱한 모양이라고는 생각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수학적 개념, 즉 집합론의 개념들이 새로운 도구로써 유용함을 가진다는 생각이 맞을 듯 싶다. 여기서 문제는 집합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가 하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도구나 개념의 힌트를 준다 하더라도 그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써도 되는 것일까?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철학자, 혹은 인문학자들은 유용한 개념에 해당하는 어떤 이미지를 (그들이 이해하는) 과학의 용어에서 보게 되었고 새로운 명명보다는 그것을 가져다 쓰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하지만 과학의 성격상 정확한 맥락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들은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그릇된 가설을 만들어 낼 뿐이다.

단순히 개념의 우선권싸움 혹은 밥그릇싸움으로 보일 법 한데 상황은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우선 고려해 볼 것은 간간히 언급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로써 과학의 발전마저도 사회적인 영향하에 있다는 것이다. 

질문: 이런 상대주의는 어떤 맥락에서 설명을 해야 할까? 나중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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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권위와 그 비판자들

국내외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대한 해부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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