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된 전직 고문 기술자

신문 기사를 읽다 악명 높던 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가 이번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글 바글 끓어 오르는 댓글처럼 내게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영화 <밀양>에서 희생자들의 용서없이 회개만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모든 짐을 내려놓은 납치범의 예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라는 이근안씨에게 충고도 한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근안씨의 이미지는 대개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옮겨온 것이다. 단편소설 <붉은 방>에서 임철우는 피고문자와 고문자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래도 독자는 고문에 괴로워 하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에게 감정입을 하겠지만 입시반인 자식 걱정을 하는 개신교 신자인 고문 기술자의 넋두리를 듣다 보면 그가 갖고 있는 의외의 서민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귀자의 <천마총 가는 길>에서 고문으로 망가진 주인공이, 어느날 가족과 들른 갈비집에서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두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고문자와 맞닥뜨린 상황에서, 마치 옆집 이웃을 만난듯이 대하는 그를 보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공 용의자를 짐승으로 격하시킨 후 행하는 고문들을 그들은 단순한 직업으로 여기며 자신들을 서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포악스러운 고문 기술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 그리고 자식 사랑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수배 생활로 인한 어려움과 옥중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은 아마 서민으로서 생활하던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맡아 주시니 말이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세속적 구원을 늘 바라고 있지 않던가. 누구나 어떻게서든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마음 속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싶어할 것이다. "아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라며 <행복의 나라로>에서 한대수가 외칠 때 우리들이 공감했던 이유는 우리 모두 구원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교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 세속적 구원은, 구원을 희구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교적 구원과 세속적 구원의 차이는 여기에서 온다. 하지만 기복 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적인 구원을 통해 세속적인 구원 역시 이루려고 한다. 이근안씨는 종교적 구원을 통해 기구했던 자신의 과거와 마음 속의 상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세속적 구원 역시 받았던 것이다.

우리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는 세속적인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종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것이 제일 먼저이겠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참회 역시 그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더욱이 그 역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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