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권혁웅 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 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 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어렸을 적 키우던 강아지가 며칠을 낑낑대며 앓다가 죽은 이유가 꼬맹이들이 던져준 풍선 쪼가리들을 과자로 착각해 덤벼들었기 때문인 것을 알았을 때 녀석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집 앞 둔덕에 모종삽으로 강아지를 묻어준 자리가 잡풀로 덮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내 화는 오래가지 않았더랬다. 어릴 때 겪었던 죽음은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땅속에 묻혀 풀들의 거름이 되던, 길바닥에 버려져 구더기가 끓는 흉물이 되던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평온한 모습을 띠게 되었더랬다. 하지만 요즈음 내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그리고 주변 아는 분들에게서 듣는 죽음들앞에서 나는 더이상 그러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기 힘들게 됐다. 죽음은 편안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홀연히 퇴장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간다.
돼지가 너무 안 됐다.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우아하게 몸을 날려 자진하는 슬픔을 보여준' 돼지에 대한 연민은, 고스란히 사람들 맘속에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맑은 하늘을 비추는 우물 속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 보다가' 날카로운 푸른 빛을 띠는 수면에 잠긴 돼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슬픈 얼굴로 혀를 찬다'. 우물은 폐쇄되고 겨울에 내리는 눈이 그 위를 덮으면서 연민도, 죄책감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서늘한 우물 안에서 사람들에게 시위하던 돼지는 사람들의 '식욕'과 함께 세상에서사라진다.
봄이 오고, 잊은 줄 알았던 돼지는 사방팔방 '꿀꿀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화사한 꽃들 뒤에 있는 강렬한 선짓빛 기운. 무의식적으로 죽음의 쓸쓸한 이미지만 모으고 있었는데 글을 읽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소한 기억의 단편이 요즘 느끼는 죽음의 무거움을 덜어주지는 못 하겠지만 일 년을 거쳐 돌아온 돼지의 이미지는, 어릴적 보던 죽음의 평온함위에 생기를 더해 주고 그렇게 두 이미지들, 평온함과 쓸쓸함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준다.
그 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 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어렸을 적 키우던 강아지가 며칠을 낑낑대며 앓다가 죽은 이유가 꼬맹이들이 던져준 풍선 쪼가리들을 과자로 착각해 덤벼들었기 때문인 것을 알았을 때 녀석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집 앞 둔덕에 모종삽으로 강아지를 묻어준 자리가 잡풀로 덮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내 화는 오래가지 않았더랬다. 어릴 때 겪었던 죽음은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땅속에 묻혀 풀들의 거름이 되던, 길바닥에 버려져 구더기가 끓는 흉물이 되던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평온한 모습을 띠게 되었더랬다. 하지만 요즈음 내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그리고 주변 아는 분들에게서 듣는 죽음들앞에서 나는 더이상 그러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기 힘들게 됐다. 죽음은 편안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홀연히 퇴장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간다.
돼지가 너무 안 됐다.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우아하게 몸을 날려 자진하는 슬픔을 보여준' 돼지에 대한 연민은, 고스란히 사람들 맘속에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맑은 하늘을 비추는 우물 속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 보다가' 날카로운 푸른 빛을 띠는 수면에 잠긴 돼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슬픈 얼굴로 혀를 찬다'. 우물은 폐쇄되고 겨울에 내리는 눈이 그 위를 덮으면서 연민도, 죄책감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서늘한 우물 안에서 사람들에게 시위하던 돼지는 사람들의 '식욕'과 함께 세상에서사라진다.
봄이 오고, 잊은 줄 알았던 돼지는 사방팔방 '꿀꿀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화사한 꽃들 뒤에 있는 강렬한 선짓빛 기운. 무의식적으로 죽음의 쓸쓸한 이미지만 모으고 있었는데 글을 읽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소한 기억의 단편이 요즘 느끼는 죽음의 무거움을 덜어주지는 못 하겠지만 일 년을 거쳐 돌아온 돼지의 이미지는, 어릴적 보던 죽음의 평온함위에 생기를 더해 주고 그렇게 두 이미지들, 평온함과 쓸쓸함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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