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
박사 학위가 세상의 사람들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로써 쓰이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굳이 다른 노력을 할 필요없이 나의 위치가 정해지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나의 것의 위계를 정해 주는 것은 종종 박사 학위의 힘이었다. 하지만 활기차게 움직이지 않는, 딱딱하게 굳은 지식을 주렁 주렁 머릿속에 넣은 채 사람들 속에서 행세할 때 반드시 느낄 수 밖에 없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허영이 아닐까-은 자의식 과잉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허영과 본래 모습에서 고민하다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하는 고백을- 박사 별거 아녜요-사람들은 으레 하는 말로 흘려 들을 것이고, 당사자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고백에 안도하며 다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물론 약간의 면죄부를 얻은 채 말이다.
세상에 다양하게 보이는 위선의 모습 중에 지식인의 것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들의 학식 속에 깃들어 있을것이라 믿어지는 사리판단의 능력이 실상 여느 사람의 것과 같거나 심지어는 더 처짐에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식의 체계로 그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의 한 방편인 허영이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루를 하는일 없이 보내는 국문학 시간 강사 윤주에겐 아파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고욕이다.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을 그는 경멸하고, 강아지 주인들이 몰상식함을 믿는 그의 확신은 강아지를 죽이는 자신의 합리화로 이어진다. 새벽에 방송국이라고 장난 치는 전화에 긴장하고 나갈 준비까지 할 정도로 순진한 관리 사무소 경리직원 현남은, 강도를 물리친 새마을 금고 여직원의 활약상과 텔레비전 출연을 동경하고 있다. 어느 날 누군가 아파트 옥상에서 개를 던지는 경악할 장면을 보고 강아지 연쇄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 관리 사무소 밖으로 나선다.
윤주는 자신의 주변이 허영으로 채워져 있음을 두 가지정도 측면에서 자각하게 된다. 한 가지는 그 자신의 내부에서 온다. 몰상식에 대한 윤주의 규정이 너무 교과서적이었음이, 옥상에서 던진 강아지 주인이었던 할머니의 죽음을 알게되는 장면에서, 아무 연고도 없이 강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윤주의 얼굴 표정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아내의 퇴직금을 고스란히 학장에 대한 뇌물로 예쁜 케익과 함께 담겨 배달하는 모습은, 게다가 돈과 함께 상자에 케익을 집어넣다 걸리적거리는 딸기 토핑을 우적 우적 씹어먹는 윤주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루함이다.
또 다른 측면은 바로 현남과의 관계에서 온다. 아내가 퇴직금으로 샀지만 윤주가 실수로 잃어버린 강아지 '순자'를 찾기 위해 윤주는 강아지 실종 사건의 주범임을 숨기고 현남과 합류한다. 노란 잠바 모자의 끈을 질끈 동여매고 범인을 쫓는 현남의 동기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자신을 꿈꾸는 남루한 상상이고 그녀가 보이는 행동은 앞 뒤 재지않는 무모함이다. 윤주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내의 '순자'를 찾고 싶을 뿐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오는 밤을 꼬박 새며 개 찾는 광고를 붙이는 일이다. 동기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은, 현남의 굳은 의지를 표현해 주는 노란 잠바에 모자를 동여맨 장면과 윤주가 빗속에서 추레한 노란 비옷을 입은채 망연히 서 있는 장면이 짝을 이루며 잘 나타내 준다. 이 두 가지의 대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쪽은 현남이다. 아파트 모든 옥상에서 종이가루와 응원수술을 휘날리며 자신을 응원하는 노랑이들을 배경에 두고 현남은 순자를 구워먹으려 하는 노숙자에게 용감히 돌진한다. 교수 임용의 중요한 시점에 뇌물을 마련한 아내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밤을 샜던 윤주의 노력은 별 소득이 없었고 유치하다고 할 수 있는 현남의 영웅 심리가 사건을 해결했던 것이다.
자신의 허영에 대한 자각은 윤주가 현남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것으로 발전한다. 강아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현남이 결국은 관리사무소에서 해고됐음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그러했을터이다. 학장과의 폭탄주로 인사불성이 된 그는 현남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앞에 달릴테니 뒤에서 따라 오면서 잘 봐달라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고, 그는 멋쩍게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하지만 현남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채 애꿎은 구두만 찾고 있을 뿐이다. 고백이 전달되지 않은 상황. 장면이 바뀌어 창 밖을 보다가 학생의 재촉에 강의를 시작하는 윤주. 슬라이드 상영을 위해 강의실과 창 밖의 풍경은 두꺼운 커튼을 통해 안팎으로 나뉘고 윤주는 창 밖이 커튼에 모두 가려질 때까지 풍경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결국 윤주는 허영에 안착하게 되었지만 그의 자의식 속에서는 창 밖 풍경 속 어디에선가 그를 향해 현남이 거울로 반사시킨 햇빛으로 그를 도발하고 있다.
덧글. 윤주의 고백마저 안착한 자의 여유가 된다. 구걸인에게 두 사람이 한 같은 행동들과 다른 반응들. 윤주가 케익상자에 서 뺀 만원과 현남이 잠결에 베풀었지만 거절당한 호의.
덧글2. 참 웃기던 장면들 몇 개: 복사기의 밝은 빛이 윤주의 얼굴을 범인형으로, 현남을 취조자의 모습으로 바꿀 때 윤주가 흘리던 코피. 지하실에서 안경을 부러뜨린 후 큰 뿔테 안경으로 바꿔 쓰면서 본격적인 찌질이로 바뀜. 그리고 아파트 옥상에서 현남을 응원하던 노랑이들. 죽은 할머니가 혹시 큰 유산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한 무말랭이 장면.
덧글3. 영화의 주제를 딱 한 줄로 설명하는 영화 속 대사. "박사 대가리나 국졸 대가리나 지하철에 받히면 쪼개지기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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