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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Bagdad cafe)] Percy Adlon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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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비포 선라이즈, 레옹, 이터널 선샤인 등이 다시 상영되면서 옛날 영화들 재개봉으로 꽤 관객들을 모으는구나 싶었는지만, 바그다드 카페가 다시 상영된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외로운 두 주인공이 서로 친구가 되는 줄거리는 가물가물하고 영화 내내 깔린 독특한 분위기와 주제가 I'm calling you만 기억에 온전히 남아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사에 남는 에스에프도 아니고 매력적인 킬러도 안 나오고 독특한 사랑이야기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SKT 옥수수에 무료로 올라온 영화를 냉큼 재생하지 않고 뜸을 들인 이유도 비슷했다. '분위기는 독특하긴 했지, 주제가도 그렇고. 그런데 또 봐봤자 뭐 다를려나?' 망설이긴 했지만, 휴대폰에서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절에 결제해야 할 유일한 재화는 내 시간과 집중 뿐이고 마침 그 시절 향수를 불러올 거라는 기대만큼 값어치를 했다고 느꼈는지 영화를 휴대폰으로 불러왔다. 침대에서 감상을 하는 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재개봉한 바그다드 카페는 감독판이다. 게다가 글을 쓰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동안 블루레이로만 발매됐지 실제 극장에서 개봉한 것은 한국이 유일한 것 같다. 똘똘하지 못한 기억력으로는 거의 끝 부분에 나오는 뮤지컬 장면 빼고는 새로 추가된 장면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의 감수성이 지금도 색이 바래지 않은 것 역시 눈에 띄었다. 흔히 촌스럽다고 부르는 분위기들은 팔구십 년대 초 감성들이 영화에 묻어나기 때문일텐데 이 영화의 배경이 팔십년대 후반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소품은 브렌다의 딸이 입고 나오는 형광색 쫄쫄이 뿐이다. 게다가 베가스 근처 사막 지역에 홀로 서 있는 바그다드 카페 주변은 영화 내내 반복해서 묘사하듯이 시간이 흘러가지 못하고 먼지처럼 켜켜이 쌓일 듯한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읊조리는 듯이 느리게 흘러가는 주제가는 사막의 시간과 풍경을 뭉뚱그려 놓은 분위기이다. 영화의 배경과 ...

아파트 체육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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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진 날씨에 밖에서 뛸 엄두가 나지 않아 아파트 체육관에 등록을 하고 두 번째, 숨이 차오고 땀이 송글송글 맺히지만 런닝머신 위 달리기는 단조롭다. 기계가 마주보고 있는 창 밖은 어둠에 막혔으니 시선이 닿는 곳은 유리창에 비친 체육관 내부뿐, 기계 앞 티브이에서는 <여섯시 내고향> 리포터가 시장 오뎅가게 달인과 주고 받는 만담이 흘러나오고, 아파트 주민들은 대여섯 남짓, 원하는 근육을 자극하는 동작들을 조용히 반복하고 있다. 운동만 해야하는 장소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뜀박질을 하고 있으니, 왕복 칠 킬로미터 남짓 거리에 펼쳐진 강변 길 여러 풍경들과 길 위에서 반가운 이를 만나는 상상을 떠올리며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을 시작하는 설렘도 없고, 태화강변 너머 논밭까지 덮은 땅거미와 실루엣만 남은 산등성이 어깨에 걸린 선홍빛 노을을 배경으로 외진 곳에 생뚱맞게, 하지만 홀로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삼겹살 집 엘이디 간판을 볼 수도 없고, 무릎 나온 운동복과 목 늘어난 티셔츠에 형광색 엘이디가 번쩍이는 헤드폰을 쓰고 엉거주춤 주법으로 내 옆을 쏜살같이 앞질러 가던 분, 그리고 경쾌한 트로트를 앞세우며 썬글라스와 군복으로 한껏 멋을 낸 자전거 라이더 분을 만날 일이 없고, 내 뒤를 무심하게 쫄래쫄래 따라오다 포기하고 우두커니 멈춰있던 꾀죄죄한 푸들 유기견이 전 주인의 사랑을 기억하며 느꼈을 하염없는 기다림을 달리기 중 떠올리곤 들숨에 목이 메지 않을 거고, 이유를 알 수 없게 몰려오는 충동에, 몸에 무리가 갈까봐 조심스럽던 보폭을 허물어 무릎을 가슴까지 들어올리며 숨이 멎을듯이 수백미터를 달리면서 풍경을 뒤로 제치는 폭주를 하지도 않을 거고, 어둠 속 달리기가 느려지면서 무료해질 즈음 뒤에서 사이다 바람이 불어와 나를 슬며시 밀어줄 때, 오른편 하늘에 고색창연한 노을이 있는 걸 알아채고는 영화 속 장면을 흉내내며 쑥스럽게 팔을 펼쳐서 강변에 넘치던 생기로움을 음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계기판 숫자들 중 칼로리와 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 삼백 킬로칼로리...

시국 선언

어제 유니스트에서 백오십명의 교수님들이 박근혜 퇴진 및 새 내각 구성을 요구하며 시국선언을 하였고 참여교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투표를 제외하고는 사회생활 시작 후 겉으로 드러낸 가장 정치적인 행동일 듯 싶다. 간편하게 이메일로 서명동의를 하고 서울 출장으로 선언식도 불참했으니 시국선언의 무게감과는 반대로 참 가볍게 끝냈다.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온 심포지엄도 그렇고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퇴근시간 만원전철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껴 보고 열두시 넘어가는 시각임에도 승객으로 꽉 차있는 ktx를 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익명으로 하루를 보냈다. 가장 정치적이어야 하는 날에 많은 사람들 틈에서 소통없이 지낸 셈이다. 최근 여론 조사를 생각해 보면 어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목소리를 내보지만 익명으로 흩어져 버리는 상황. 오늘 광화문 시위는 지난번 보다 규모가 클 것 같다고 한다. 목소리들을 한 데 모아 함께 외치는 연대의 기쁨을 기대하며 한켠으로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 열심히 응원하고,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느끼는 부채의식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나태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정도가 될 것 같다.

태화강에서 달리기

뜀박질을 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나오는 데, 오후 여섯시에 땅거미는 한참 전에 지고 사위를 밝히는 것은 아파트 불빛, 가로등과 도로변 간판 같은 전깃불들이다. 그대로 태화강에 가면,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뛰지도 못하고 서늘해진 강변길 어둠 속을 혼자 헤쳐갈 듯 해서 영 흥이 안 돋았다. 광역시라지만 울주군은 외곽지역인지라 아파트 촌을 벗어나 강변에 다다르니 예상대로 길을 밝혀주는 것은 자기 기둥뿌리만 비추는 가로등 뿐, 그마저 이번 태풍에 드문드문 고장이 났으니 사이는 더 멀어지고 쌀살해진 날씨에 손전등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줄어 가로등 사이는 마치 어두운 터널의 시작과 끝 같았다. 평소라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줍고 있는 사람에게 달리기 도중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하진 않을텐데, 그 어둠 속 바닥에서 살짝 솟아있는 상반신 실루엣은 많이 낯설고 음산했다. 익숙치 않은 어둠 덕에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뜀박질하는 강변 왼쪽은 대나무 벽을 따라 논밭 또는 생활공원들, 그 너머로 아파트 촌들이 산책길 내내 이어진다. 오른쪽은 강폭이 좁아진 태화강 너머, 울산톨게이트에서 출발한 고속도로가 나란히 붙어있다. 어둠 속을 달리니 비로소 주변을 둘러싼 빛무리들이 두 종류로 나뉨을 알게 됐다. 토요일이라 집집마다 모두 불켜진 아파트들은 새하얗다 못해 자기 머리 위 하늘도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조명이 그닥 필요없는 고속도로는, 색온도 낮은 도로등들이 온전히 길 위만 비추어 가을 어둠 덕에 온기가 살아나는 귤 색의 긴 터널을 품고 있었다. 뜀박질 하며 고개를 좌우로 꺾어 두 빛들을 번갈아 살펴보고 있으니, 우습게도 찻길은 보금자리 같은 아늑함을 품었고 아파트들은 새하얗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헉헉대며 힘들게 속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양쪽의 빛 무더기는 멀게 느껴지고 이따금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됐다. 봄날 그림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방에서 피어나는 온기에 밀려 서늘함이 숨어 들어간 곳이라고...... ...

[터널] 김성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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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았던 재난영화들에서 재난을 일으키는 요인은 다양하다. 지진, 태풍, 외계인의 침공, 권력자의 탐욕 및 부주의 등등. 영화 <터널>에서도 여느 이유와 다르지 않게 부실시공으로 터널이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시대를 그려주는 한국영화로써 <터널>은 다른 원인들을 추가한다. 진중권씨가 몇 번 지적했듯이 근대화를 제대로 거친 사회라면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다. 사실 합리성을 과학 밖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 및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대규모 토목공사이다. 설계도, 환경조사, 시공, 감리같이, 할 일들을 수치로 속박하고 결과로 나온 자료들을 다시 비교하여 확인하여야 한다. 그런데 구조작업 밑바탕에 깔려있는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허무하게 깨진다. 현실 인물 및 매체에 대한 풍자,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들이 엮이면서 꽤 재밌게 감상했더랬다. 많은 사람들이 평하듯이 영화에서 세월호의 비극에 대한 은유를 큰 주제로 볼 수 있지만, 이를 빼더라도 잘 뽑힌 상업영화인 듯 하다. 특히 <해운대>류 신파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서 좋아하던 노래가 나올 때 울컥했다. 영화를 밝게 마무리한다고 그 노래를 엔딩크레딧(ending credit)에 넣으면 어떨까 싶었지만, 너무 상투적일 듯 싶으니 지금 영화 마무리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태풍 차바

태풍 차바가 상륙한 이른 아침은 조용했지만, 학교에 도착했을 때부터 우산을 쓰고 걷기가 힘들정도로 날씨가 악화됐다. 열 시에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었다. 폭우는 강풍에 날려 중력을 거스르며 온갖 방향으로 흩날리고, 건물을 휘감는 바람들은 큰 유리창을 우퍼삼아 기분나쁜 저음들을 연구실 안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세상이 식기세척기 안에 있는 것 같다!", 라고 발표 중인 대학원생에게 탄식을 내뱉고 있을 때, 학교에서 십분거리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수백 대의 차가 침수 됐고, 한 분이 목숨을 잃었다. 열두 시가 지나자 태풍은 온데간데 없이 사그라들고 하늘마저 파랗게 개었다. 멀쩡히 버텨낸 것들에게는 상큼한 하늘과 공기였지만 휩쓸리고 침수당한 사람들에게는 아픈 생살이 훤히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공동체 단위의 공포

지진이 왔던 저녁, 추가 지진을 걱정하며 동네공원으로 가는 피난길은 떠나는 차량들과 서성이는 주민들로 아파트 출구부터 붐볐더랬다. 가족들로 가득찬 공원은 소란스러웠지만 그것을 활기로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늦은 시간 공원을 메운 인파는 보기 힘든 광경임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사실 공원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배회하며 웅성이는 것을 본 순간 어렸을 때 온 동네가 정전됐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쏟아져나온 주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익숙한 집밖을 나와 한데를 배회하는 모습은 같지만 사람들이 품고있던 두 종류의 기다림은 성질이 사뭇 다르다. 과거의 지진들이 일상을 환기시키는 정도였다면 규모 6에 근접하는 지진은,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을 대부분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 꽤 낯설게 변할 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공포감을 주었을 것이다. 단단한 아파트 벽이 더이상 견고하지 않고, 자연의 심술에 뒤틀리고 주저앉을 수 있을 수도 있다니..... 특히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좌우로 흔들리는 방안에서 우리 아파트 동이 뿌리채 뽑혀 긴 호를 그리며 넘어지는 중에 거실의 평평한 바닥이 빗면으로 변하는 상상을 하며 현기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공원으로 피신해 배회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을 곱씹은 분들도 꽤 되지 싶다. 개인이 겪는 범위를 벗어난 공동체단위의 공포감을 목격하면서 원시종교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본 것 같다. 꼬맹이적에 근처 하늘에서 터진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며 방바닥에 엎드려 떨면서 얼른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길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무자비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추측이 떠올랐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납득했더랬다. 두려움,회피,체념,초월적 존재에 대한 본능적 인지의 순서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감정과 행동이 동기화되었을 때 비로소 기본적인 형태의 종교가 생겼을 듯 싶다. 어렸을 적 경험은 지금이야 코웃음치고 말 상황이지만 초월적 존재에 ...

하나님이 예비하신 시련

서울 출장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박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젤 SUV라 어쩔 수 없는 소음에 짤막하게 이어갈 수 밖에 없던 여러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경주를 지날 때쯤 마주친 정체로 조용해진 차 안에서 무거운 종교 주제로 흘러갔다. 그리고 몇 십분동안 기복신앙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비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몇몇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저주임을 같이 확인하였기에 종교의 해악에 대해 별 이견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모태 무신론자인 전 박사님과 나이롱이긴 하지만 개신교 신자인 나 사이에 틈이 없을리 없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혼돈이 걷혀 평온한 상태인 구원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지만 그 둘이 세상에 양립하고 있기때문에 우리들은 선한 신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우리의 영적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시련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고 가르친다. 영화 밀양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받아들여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럼에도 예비된 시련이란 개념은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밀양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시련 속에서 자책감, 비탄, 무기력함, 사무침은 찬란한 햇볕으로도, 넋을 놓는 울음으로도, 상대에 대한 무한한 증오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혼돈이며 당사자의 실존을 위협한다. 망각이 유일한 해결책일테지만 이럴 때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지 않던가.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혼돈은 너무나도 깊고 넓어서, 이를 품어주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는 '우리 세상의 주소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친 우리들이 찾는 구원은 세상의 바깥에 있을 터이다. 예정됨과 불가피함을 믿기로 결심하게 되면 전능의 존재는 이렇게 달래준다. '네 탓이 아니다. 너의 무거운 짐을 내게 맡기어라'. 비로소 당사자는 비탄 이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그만 여유, 구원의 가능성을 마음 속에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