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예비하신 시련
서울 출장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박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젤 SUV라 어쩔 수 없는 소음에 짤막하게 이어갈 수 밖에 없던 여러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경주를 지날 때쯤 마주친 정체로 조용해진 차 안에서 무거운 종교 주제로 흘러갔다. 그리고 몇 십분동안 기복신앙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비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몇몇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저주임을 같이 확인하였기에 종교의 해악에 대해 별 이견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모태 무신론자인 전 박사님과 나이롱이긴 하지만 개신교 신자인 나 사이에 틈이 없을리 없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혼돈이 걷혀 평온한 상태인 구원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지만 그 둘이 세상에 양립하고 있기때문에 우리들은 선한 신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우리의 영적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시련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고 가르친다. 영화 밀양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받아들여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럼에도 예비된 시련이란 개념은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밀양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시련 속에서 자책감, 비탄, 무기력함, 사무침은 찬란한 햇볕으로도, 넋을 놓는 울음으로도, 상대에 대한 무한한 증오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혼돈이며 당사자의 실존을 위협한다. 망각이 유일한 해결책일테지만 이럴 때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지 않던가.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혼돈은 너무나도 깊고 넓어서, 이를 품어주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는 '우리 세상의 주소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친 우리들이 찾는 구원은 세상의 바깥에 있을 터이다. 예정됨과 불가피함을 믿기로 결심하게 되면 전능의 존재는 이렇게 달래준다. '네 탓이 아니다. 너의 무거운 짐을 내게 맡기어라'. 비로소 당사자는 비탄 이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그만 여유, 구원의 가능성을 마음 속에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비된 시련에 대해 내가 이해한 방식이고 차 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물론 힘든 사람들이 선택하는 감정적 탈출구 정도로 어리버리 얘기하고 말았지만..... 하지만 전박사님은 예비된 시련의 개념이 한국에서 어떻게 남용되고 있는지 환기시켜주었다. 당연히 불행의 존재는 기복신앙을 위협할 수 밖에 없고 교회 CEO들은 신자 고객의 이탈을 막기 위해 예비된 시련의 개념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예비된 시련에 대한 이야기들이 욥기에 많이 나온다고, 모태 무신론자가 나이롱 신자에게 알려준 것은 아이러니겠다. 언양에 도착하면서 대화는 끝이 났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상상해 보면, 꺼이꺼이 목놓아 울부짓던 주인공의 울음이 잠시 잦아들었을 때, 마음 속은 인터넷에서 찾은 시에 묘사된 것과 같지 않았으려나, 싶다.
저 돌들 모두 젖으면
이 희 중
잠시 내린 비는 결코 돌 속 깊이 적시지 못하고
한때의 슬픔도 삶의 내막을 모두 적시지는 못하네
그러나 어느 때 멎지 않는 비 내려 저 돌들
보이지 않는 속까지 모두 적시면, 그래
두 손으로도 닦지 못할 슬픔이 몰려오면, 세상에
생긴후 처음으로 젖어보는 마음의 종이도 있겠지
눈물의 바다에 표정없는 아이는 채 젖지 않은
한 장 마음의 종이로 배를 접어 띄우고
마를 날 없는 더러운 항구를 아주 떠날지도 몰라
한철내 우는 빗속을 웃으며 등돌리며, 설령
맑은 날이 다시 온다해도 보이지 않는 돌의 속은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사람들은 겉만 마른
돌을 보며 자신의 젖지 않은 마음을, 없는 사랑을
한참은 뒤적여 찾아볼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혼돈이 걷혀 평온한 상태인 구원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지만 그 둘이 세상에 양립하고 있기때문에 우리들은 선한 신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우리의 영적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시련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고 가르친다. 영화 밀양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받아들여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럼에도 예비된 시련이란 개념은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밀양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시련 속에서 자책감, 비탄, 무기력함, 사무침은 찬란한 햇볕으로도, 넋을 놓는 울음으로도, 상대에 대한 무한한 증오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혼돈이며 당사자의 실존을 위협한다. 망각이 유일한 해결책일테지만 이럴 때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지 않던가.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혼돈은 너무나도 깊고 넓어서, 이를 품어주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는 '우리 세상의 주소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친 우리들이 찾는 구원은 세상의 바깥에 있을 터이다. 예정됨과 불가피함을 믿기로 결심하게 되면 전능의 존재는 이렇게 달래준다. '네 탓이 아니다. 너의 무거운 짐을 내게 맡기어라'. 비로소 당사자는 비탄 이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그만 여유, 구원의 가능성을 마음 속에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비된 시련에 대해 내가 이해한 방식이고 차 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물론 힘든 사람들이 선택하는 감정적 탈출구 정도로 어리버리 얘기하고 말았지만..... 하지만 전박사님은 예비된 시련의 개념이 한국에서 어떻게 남용되고 있는지 환기시켜주었다. 당연히 불행의 존재는 기복신앙을 위협할 수 밖에 없고 교회 CEO들은 신자 고객의 이탈을 막기 위해 예비된 시련의 개념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예비된 시련에 대한 이야기들이 욥기에 많이 나온다고, 모태 무신론자가 나이롱 신자에게 알려준 것은 아이러니겠다. 언양에 도착하면서 대화는 끝이 났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상상해 보면, 꺼이꺼이 목놓아 울부짓던 주인공의 울음이 잠시 잦아들었을 때, 마음 속은 인터넷에서 찾은 시에 묘사된 것과 같지 않았으려나, 싶다.
저 돌들 모두 젖으면
이 희 중
잠시 내린 비는 결코 돌 속 깊이 적시지 못하고
한때의 슬픔도 삶의 내막을 모두 적시지는 못하네
그러나 어느 때 멎지 않는 비 내려 저 돌들
보이지 않는 속까지 모두 적시면, 그래
두 손으로도 닦지 못할 슬픔이 몰려오면, 세상에
생긴후 처음으로 젖어보는 마음의 종이도 있겠지
눈물의 바다에 표정없는 아이는 채 젖지 않은
한 장 마음의 종이로 배를 접어 띄우고
마를 날 없는 더러운 항구를 아주 떠날지도 몰라
한철내 우는 빗속을 웃으며 등돌리며, 설령
맑은 날이 다시 온다해도 보이지 않는 돌의 속은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사람들은 겉만 마른
돌을 보며 자신의 젖지 않은 마음을, 없는 사랑을
한참은 뒤적여 찾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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