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08의 게시물 표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 정윤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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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비극을 간직한 유쾌한 인간. 테리 길리엄의 <피셔킹(Fisher King)>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피셔킹>에서 볼 수 있던 두 사람의 우정이 <슈퍼맨>에서는 안 보인다. 영화에서 송수정은 거의 관찰자에 가깝다고나 할까. 영화를 다 보고나니 수정의 남자 친구의 존재는 무슨 역할인가 궁금해졌다. 영화 끝에서 한 번이라도 등장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자칭 슈퍼맨 이현석에게 수정이 마음을 열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까?  영화 삼분의 이까지, 심지어는 이현석의 과거와 비극을 보여준 지점과 "괴물"의 등장 후 구조가 시작되기전 자신의 임무를 깨닫는 장면까지 잘 정돈된 느낌이라면 그 이후부터 영화 끝까지는 휘몰아 치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출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평범한 앞 부분이 아쉬웠다. 예상과는 다르게 슈퍼맨의 과거의 비극보다는 슈퍼맨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한 느낌이랄까.  가족의 비극을 보여주는 장면은 별 장치없이 바로 병원의 갱생장면과 연결돼서 중요한 부분을 왜 별 고민없이 찍었을까 의아해 했는데 아마 감독은 마지막 슈퍼맨의 활약을 더 부각 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다. <피셔킹>에서 전직 교수 페리의 비극을 보여주는 방법을 굳이 택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감정의 강약조절을 기대했었으니 그 부분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슈퍼맨이었을 때와 인간으로 돌아온 후의 대비가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만 영화 자체는 그렇게 못마땅하지 않았다. 영화의 앞과 뒤가 잘 정돈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가령 창문 아래서 아이를 안은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오는 슈퍼맨 아버지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앞 부분에서 전광판 트럭장면으로 아버지와의 교감을 한 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쉽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K-PAX의 아류작으로 치는 것은 ...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기를 묻혀 준다] Georges Rouault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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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juste, comme le bois de santal, parfume la hache qui le frappe>  Georges Rouault 작품보다 제목이 더 잘 알려진 판화일 듯 싶다. 그림 보기는 영 젬병인데다가 작품과 맞추어 볼 경험도 마땅한게 없는지라 처음 볼 때는 판화 속 상황조차도 잘 이해를 못 한채 전체적인 우울함만 눈에 띄었다. 판화를 걸어논 미술사이트에서 설명을 읽어본 후에야 죽은 이를 엄마, 딸, 그리고 날개달린 천사가 나르고 있고 네 인물들의 어깨위로 밝은 빛이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빛들이 이 판화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예수님의 빛나는 얼굴이 이들을 내려다 보고 계신다. 엄마와 딸의 비탄에 젖은 모습과는 대조적인 죽은 이의 평화로운 얼굴은 아마도 판화의 제목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엉성한 추측만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있다면 각 인물들의 상체에 비추는 빛들이 이어져 예수님의 얼굴과 만나고 있는 점이다. 이 동그란 원의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은혜로움이 모든 인물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판화를 보면 볼 수록 예수님의 얼굴이 계속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그 동안 기도 드리면서 예수님의 이미지가 너무 막연했었는데 눈을 감고 떠올릴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 하나를 찾은 듯 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권혁웅 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 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 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어렸을 적 키우던 강아지가 며칠을 낑낑대며 앓다가 죽은 이유가 꼬맹이들이 던져준 풍선 쪼가리들을 과자로 착각해 덤벼들었기 때문인 것을 알았을 때 녀석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집 앞 둔덕에 모종삽으로 강아지를 묻어준 자리가 잡풀로 덮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내 화는 오래가지 않았더랬다. 어릴 때 겪었던 죽음은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땅속에 묻혀 풀들의 거름이 되던, 길바닥에 버려져 구더기가 끓는 흉물이 되던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평온한 모습을 띠게 되었더랬다. 하지만 요즈음 내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그리고 주변 아는 분들에게서 듣는 죽음들앞에서 나는 더이상 그러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기 힘들게 됐다. 죽음은 편안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홀연히 퇴장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어 간다.    돼지가 너무 안 됐다. ...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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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가 세상의 사람들과 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로써 쓰이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굳이 다른 노력을 할 필요없이 나의 위치가 정해지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나의 것의 위계를 정해 주는 것은 종종 박사 학위의 힘이었다. 하지만 활기차게 움직이지 않는, 딱딱하게 굳은 지식을 주렁 주렁 머릿속에 넣은 채 사람들 속에서 행세할 때 반드시 느낄 수 밖에 없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허영이 아닐까-은 자의식 과잉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허영과 본래 모습에서 고민하다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하는 고백을- 박사 별거 아녜요-사람들은 으레 하는 말로 흘려 들을 것이고, 당사자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고백에 안도하며 다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물론 약간의 면죄부를 얻은 채 말이다. 세상에 다양하게 보이는 위선의 모습 중에 지식인의 것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들의 학식 속에 깃들어 있을것이라 믿어지는 사리판단의 능력이 실상 여느 사람의 것과 같거나 심지어는 더 처짐에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식의 체계로 그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의 한 방편인 허영이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루를 하는일 없이 보내는 국문학 시간 강사 윤주에겐 아파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고욕이다.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을 그는 경멸하고, 강아지 주인들이 몰상식함을 믿는 그의 확신은 강아지를 죽이는 자신의 합리화로 이어진다. 새벽에 방송국이라고 장난 치는 전화에 긴장하고 나갈 준비까지 할 정도로 순진한 관리 사무소 경리직원 현남은, 강도를 물리친 새마을 금고 여직원의 활약상과 텔레비전 출연을 동경하고 있다. 어느 날 누군가 아파트 옥상에서 개를 던지는 경악할 장면을 ...

[화려한 휴가] 김지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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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개인의 트라우마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혹은 은유나 비유가 아닌, 본격적으로 80년 광주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광주 항쟁 혹은 학살에 대한 이미지는, 대학시절 읽던 임철우씨의 단편 소설들에서 묘사된,  광주의 이미지를 머리속에 강박증처럼 새긴 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에서 처음 느끼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여러 분야-<모래시계>, <꽃잎>, <박하사탕>등등-에서 그려진 광주의 모습들은 여전히 본격적인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의 부채를 털어버리듯이 임철우씨가 써 내려갔던 장편 소설 <봄날>로 그날을 세세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봄날>을 읽으면서 몸서리 쳤던 기억들과 분노, 슬픔들은 느낌이 많이 바랬지만, 아직도 그 날들을 보는 시선들이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의 모습들을 보면, 소설을 읽던 당시 맘속에 가지고 있던 적의가 다시 살아나려 한다.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화려한 휴가>를 그동안 보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봄날>의 경험으로 인해 영화 자체에 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영화 자체가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우선 나를 끌어당길 그 소재자체는 소설에서 충분히 봤으니 말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과도한 신파와 어설픈 코미디였다. 소재 자체를 상업적인 틀에서 영화화하는 것은 반대할 것이 없지만 그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에 통했을 거라고 믿는 구태의연한 영화적 장치를 그대로 써먹으면서 소재를 우려먹는다는 생각이 드니 영화 자체가 그닥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를 두 번에 나눠서 봤다. 진압 작전이 시작되기 전, 여러 인물들이 소개되고 민우와 신애가 감정을 쌓아가는 영화 삼분의 일은 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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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40년을 근무한 보험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한 기품있는 슈미트씨는 무료하게 지내던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아프리카 기아 소년 후원 프로그램을 보고 전화를 하게 된다. 며칠뒤 날아온 지원 서류에는 엔두구라는 아프리카의 한 소년에 대한 소개가 있었고 후원자로서, 수양 아버지로서 슈미트씨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의 누구와도 연관이 없는 엔두구에게 쓰는 편지에는 일상적인 자신에 대한 소개로 시작했지만 이내 그 동안 참고 있었던 그의 속내가 드러나게 된다. 퇴직 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풋내기에 대한 경멸, 도대체 왜 같이 살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아내,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의 딸,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딸을 데려가려는 영 못마땅한 사윗감.  갑자기 아내와 사별을 하게 되고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어느날 결심을 하게 된다. 결혼식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찾아가 도와주기로 한 것. 하지만 딸의 매몰찬 거절에 방향을 틀어 자신의 인생에 중요했던 곳들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지금은 타이어 판매점인 그가 태어난 곳과 대학 시절의 동아리 등등.....  결혼식 전날에 도착해 사돈집을 둘러 봤을 때 실망을 한 그는 딸의 결혼을 말리기로 하고, 열심히 설득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결혼 준비때문에 스트레스 가득한 딸의 분노뿐이었다. 결국 그는 체념하고 피로연에서 사돈댁 식구들을 축복하며 딸이 얼마나 좋은 집에 시집을 가는지 맘에 없는 연설을 하게 된다.  길 위에서 RV차를 몰고 이곳 저곳 방문할 때 슈미트씨는 늘 엔두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딸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그는 엔두구에게 하소연한다. 이제 그는 세상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내의 죽음 후 아무 의욕도 남지 않았던 그에게 활력을 주었던 것은 딸의 잘못된 결혼을 말리려는 시도이었지만 실패했다. 큰 상실감을 안고 오마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