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알고주알] 권혁웅 저
한달 전 쯤 분당에 있는 알라딘 중고책방을 들러서 아무 정보도 없이 책을 고르는 행복한 고민을 오랜만에 했더랬다. 시간들여서 이것 저것 검색하고 책을 꺼내 살펴보고 하다가 문득 생각난 권혁웅 작가의 책들을 찾아보았다. 시집 몇 권이랑 책 <미주알고주알>이 뜬다.
'미주알고주알'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속속들이' 라는 뜻인데, 미주알은 창자의 끝부분을 일컫는 말이란다. 고주알에 대한 설명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개중 정설은 없는 것 같다.
독특한 책이다. 책의 부제인 '시인의 몸 감성사전'을 처음 봤을 때는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떠올랐다. <백과사전>과 비슷하게 저자가 나름대로 몸에 대해 고민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 아닐까 했는데 내용은 예상을 벗어났다. 몸의 각 부분, 손, 다리, 얼굴, 눈, 코 등에 대한 글들을 각각 잡다, 만지다, 찾아가다, 웃다, 울다, 보다, 맡다 등과 같은 제목으로 장을 나누었는데 한 페이지에 한 주제씩, 짧게는 한 문장에서 길게는 두세 문단의 글들을 배치하였다. 예를 들면, '찾아가다 : 다리, 발'이라고 이름 붙은 장에서 한 쪽(48쪽)은 다음과 같다.
먼지의 길
마음은 늘 비포장이었다. 왜 그리 불퉁거려야만 했을까.
이런식이다. 같은 장(55쪽)에서 약간 긴 글을 옮겨 보면,
미노타우로스
택시 운전사에게는 어떤 미로도 약도이고, 버스 운전사에게는 어떤 미로도 도돌이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어떤 미로도 불가지론이다. 내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해명되지 않은 그 사람이라니!
495쪽짜리 책에 한쪽짜리 쪽글들이 계속 이어지니 사전이라고 이름붙인게 어색하지 않다. 처음 글 몇 개를 읽어보다 선문답같은 내용을 접하고 나니 왜 저자가 책을 내게 됐는지 이해가 되었다. 시를 쓰면서 떠오른 여러 시상들 중 제대로 된 작품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묵혀두고 있던 것들을 몸과 연계시켜서 정리해 둔 결과일터이다. 실제로 저자는 머리말에서, 집필 당시 함께 작업하던 시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와 이 책을 '잇대어' 읽어달라 독자에게 부탁하고 있다.
한 쪽에 주제 하나씩이다 보니 생긴 여백들에는 이연미 화가가 삽화를 그려넣었다. 겉모습만 보면 출판사에서 매출올리기 위해 가볍게 기획한 책 같아 보인다. 하지만 유명 경구들 모음 같은 성격의 책은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글의 성격부터 많이 다르다. 마치 여러 시집에 있는 시들에서 하이라이트 부분만 떼어 모아놓은 듯, 시상의 스케치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간단한 아이디어들을 모아놨다고 해야할까, 썰렁한 말장난 같은 글도 있고 내 인식들이 고리타분함을 일깨워 주는 관찰도 있다.
맘에 들었던 글 하나(113쪽)를 옮겨본다.
무심한 시선
LG 패션 쇼윈도 안에 서 있는 마네킹이 하루종일 사방 풍경을 감시한다. 시선이 비었으므로, 무심하므로, 마네킹은 어느 것 하나 눈에 담지 않는 것이 없다. 마네킹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두시 방향에서 출몰하여, 나를 힐끗거리고는, 여덟시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작가의 시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와 이어지는 글 하나(230쪽).
저 수많은 돼지머리들
상 위의 돼지머리는 왜 웃을까? 몸뚱이가 이미 대지와 하나되어 흔적도 없어졌으니, 허虛로써 몸을 삼고 공空으로 배를 채웠다. 바람은 대지의 숨결이며 대지의 웃음이다. 대지가 돼지를 통풍구 삼아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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