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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에서 달리기

뜀박질을 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나오는 데, 오후 여섯시에 땅거미는 한참 전에 지고 사위를 밝히는 것은 아파트 불빛, 가로등과 도로변 간판 같은 전깃불들이다. 그대로 태화강에 가면,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뛰지도 못하고 서늘해진 강변길 어둠 속을 혼자 헤쳐갈 듯 해서 영 흥이 안 돋았다. 광역시라지만 울주군은 외곽지역인지라 아파트 촌을 벗어나 강변에 다다르니 예상대로 길을 밝혀주는 것은 자기 기둥뿌리만 비추는 가로등 뿐, 그마저 이번 태풍에 드문드문 고장이 났으니 사이는 더 멀어지고 쌀살해진 날씨에 손전등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줄어 가로등 사이는 마치 어두운 터널의 시작과 끝 같았다. 평소라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줍고 있는 사람에게 달리기 도중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하진 않을텐데, 그 어둠 속 바닥에서 살짝 솟아있는 상반신 실루엣은 많이 낯설고 음산했다. 익숙치 않은 어둠 덕에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뜀박질하는 강변 왼쪽은 대나무 벽을 따라 논밭 또는 생활공원들, 그 너머로 아파트 촌들이 산책길 내내 이어진다. 오른쪽은 강폭이 좁아진 태화강 너머, 울산톨게이트에서 출발한 고속도로가 나란히 붙어있다. 어둠 속을 달리니 비로소 주변을 둘러싼 빛무리들이 두 종류로 나뉨을 알게 됐다. 토요일이라 집집마다 모두 불켜진 아파트들은 새하얗다 못해 자기 머리 위 하늘도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조명이 그닥 필요없는 고속도로는, 색온도 낮은 도로등들이 온전히 길 위만 비추어 가을 어둠 덕에 온기가 살아나는 귤 색의 긴 터널을 품고 있었다. 뜀박질 하며 고개를 좌우로 꺾어 두 빛들을 번갈아 살펴보고 있으니, 우습게도 찻길은 보금자리 같은 아늑함을 품었고 아파트들은 새하얗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헉헉대며 힘들게 속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양쪽의 빛 무더기는 멀게 느껴지고 이따금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됐다. 봄날 그림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방에서 피어나는 온기에 밀려 서늘함이 숨어 들어간 곳이라고...... ...

[터널] 김성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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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았던 재난영화들에서 재난을 일으키는 요인은 다양하다. 지진, 태풍, 외계인의 침공, 권력자의 탐욕 및 부주의 등등. 영화 <터널>에서도 여느 이유와 다르지 않게 부실시공으로 터널이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시대를 그려주는 한국영화로써 <터널>은 다른 원인들을 추가한다. 진중권씨가 몇 번 지적했듯이 근대화를 제대로 거친 사회라면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다. 사실 합리성을 과학 밖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 및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대규모 토목공사이다. 설계도, 환경조사, 시공, 감리같이, 할 일들을 수치로 속박하고 결과로 나온 자료들을 다시 비교하여 확인하여야 한다. 그런데 구조작업 밑바탕에 깔려있는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허무하게 깨진다. 현실 인물 및 매체에 대한 풍자,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들이 엮이면서 꽤 재밌게 감상했더랬다. 많은 사람들이 평하듯이 영화에서 세월호의 비극에 대한 은유를 큰 주제로 볼 수 있지만, 이를 빼더라도 잘 뽑힌 상업영화인 듯 하다. 특히 <해운대>류 신파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서 좋아하던 노래가 나올 때 울컥했다. 영화를 밝게 마무리한다고 그 노래를 엔딩크레딧(ending credit)에 넣으면 어떨까 싶었지만, 너무 상투적일 듯 싶으니 지금 영화 마무리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태풍 차바

태풍 차바가 상륙한 이른 아침은 조용했지만, 학교에 도착했을 때부터 우산을 쓰고 걷기가 힘들정도로 날씨가 악화됐다. 열 시에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었다. 폭우는 강풍에 날려 중력을 거스르며 온갖 방향으로 흩날리고, 건물을 휘감는 바람들은 큰 유리창을 우퍼삼아 기분나쁜 저음들을 연구실 안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세상이 식기세척기 안에 있는 것 같다!", 라고 발표 중인 대학원생에게 탄식을 내뱉고 있을 때, 학교에서 십분거리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수백 대의 차가 침수 됐고, 한 분이 목숨을 잃었다. 열두 시가 지나자 태풍은 온데간데 없이 사그라들고 하늘마저 파랗게 개었다. 멀쩡히 버텨낸 것들에게는 상큼한 하늘과 공기였지만 휩쓸리고 침수당한 사람들에게는 아픈 생살이 훤히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공동체 단위의 공포

지진이 왔던 저녁, 추가 지진을 걱정하며 동네공원으로 가는 피난길은 떠나는 차량들과 서성이는 주민들로 아파트 출구부터 붐볐더랬다. 가족들로 가득찬 공원은 소란스러웠지만 그것을 활기로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늦은 시간 공원을 메운 인파는 보기 힘든 광경임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사실 공원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배회하며 웅성이는 것을 본 순간 어렸을 때 온 동네가 정전됐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쏟아져나온 주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익숙한 집밖을 나와 한데를 배회하는 모습은 같지만 사람들이 품고있던 두 종류의 기다림은 성질이 사뭇 다르다. 과거의 지진들이 일상을 환기시키는 정도였다면 규모 6에 근접하는 지진은,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을 대부분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 꽤 낯설게 변할 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공포감을 주었을 것이다. 단단한 아파트 벽이 더이상 견고하지 않고, 자연의 심술에 뒤틀리고 주저앉을 수 있을 수도 있다니..... 특히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좌우로 흔들리는 방안에서 우리 아파트 동이 뿌리채 뽑혀 긴 호를 그리며 넘어지는 중에 거실의 평평한 바닥이 빗면으로 변하는 상상을 하며 현기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공원으로 피신해 배회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을 곱씹은 분들도 꽤 되지 싶다. 개인이 겪는 범위를 벗어난 공동체단위의 공포감을 목격하면서 원시종교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본 것 같다. 꼬맹이적에 근처 하늘에서 터진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며 방바닥에 엎드려 떨면서 얼른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길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무자비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추측이 떠올랐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납득했더랬다. 두려움,회피,체념,초월적 존재에 대한 본능적 인지의 순서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감정과 행동이 동기화되었을 때 비로소 기본적인 형태의 종교가 생겼을 듯 싶다. 어렸을 적 경험은 지금이야 코웃음치고 말 상황이지만 초월적 존재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