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08의 게시물 표시

[아스라이] 김삼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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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반응을 하게 되는 글들이나 영화를 보았을 때, 그런 매체들이 머리속에서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미지들에게 질서를 주어서 화면 혹은 활자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일련의 묘사 혹은 에피소드의 선택이 격한 감정을 일으키는 메카니즘의 한 부분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어설프게 그것을 따라해보려는 욕망이 생기기도 했었다. 창작의 욕구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분해해 하나하나 명확히 파악해서 내 상태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들을 골라낼 수 있게 인도해 주는 방법론같은 것을 얻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랄까. 가령 내 유년의 기억에서, 꿈처럼 장면과 감정이 뭉뚱거려져서 무엇을 이야기로 추려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던 차에 보게된 이명세 감독 영화 <첫사랑>에서 지붕에 버려진 종이 비행기 혹은 <M>에서 묘사된 미장원 앞길은, 감독이 자신의 기억에서 어떤 것을 추려내고 배치했는지를 나한테 설명해주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후배가 단편영화 찍는 것을 도와주고 조그만 시네마 테크에서 상영까지 마치게 된 상호는 이어서 상영된 한 단편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큰 자극을 받게 된다. 아마 상호 역시 세상을 영화를 매개로 해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된 단편 영화일은 시작부터 고생이고 결국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독립영화쪽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대한 에피소드들과 명예보다는 좋은 작품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흑백화면에서 조용히 묘사된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술자리에서 달래고 협박하며 영화 그만 찍으라라고 소리치는 후배에게 제대로 반발도 못할정도로 자신이 재능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쪽 판을 뜨지 못하는 상호의 모습과 오랜 기간동안 익히게된 전문적인 지식과 감독이라는 감투 덕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기대하는 모습, 이 두가지 장면은 내가 공부하면서 늘 생각해 오던 주제였기때문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

[마음이 만든 것] 정필원 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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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5화로 이루어진, 짧막한 단편만화를 독일에서 읽기 시작해서 한국에서 마지막 화를 보게 되었다. 첫 화의 첫번째 컷을 보았을 때 많이 익숙한 분위기라고 생각해서 단순히 다른 만화, 특히 <위대한 개츠비>의 아류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천방지축인 초등학생에게 갑자기 치마를 입히면서, 어라 머슴아가 아니었네 하는 작은 놀람과 그리고 첫 화에 마지막 장면에서 치맛속을 뽈뽈뽈 헤엄쳐 다니는 금붕어를 보면서 느꼈던 신기함이 그저 그런 작품이란 편안한 평가를 잠시 접어두게 만들었더랬다. 적은 편수만큼이나 소품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한 여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소녀의 모습을 만화는 차분하게 보여준다. 첫 화에 등장한 금붕어는 동주의 초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호진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눈치를 챈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는데 마지막 화에서 상상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확인해 준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만화의 갈등해소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하기 보다는, 만화를 읽는 우리들을 계속 동주와 호진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조류독감으로 자신의 병아리들을 폐사 시키려는 공무원을 피해 트럭에 병아리를 싣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기면증에 시달리는 양계장 주인을 수배중인 살인마로 오해하는 에피소드는 참 개성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억지같은 어린이 납치범과의 실랑이때문에 바다에 빠지면서 마지막 갈등해소로 가는 장면은 매끄럽지 못 한 듯. 아빠와 동주 담임 선생님과의 로맨스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 되는 건지.  바다에 빠진 동주를 구하느라 다쳐서 병원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는 호진이 예전에 써놓은 쪽지에 있는고백을 보면서 동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엄마에게 토로하며, 엄마를 향해 숨겨왔던 그리움을 호진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바꾸게 된다. 결국 깨어난 호진에 대한 안도감, 엄마를 보내는 미안함, 그리고 새로 깨닫게 되는 낯선 감정에 북받친 동주는 병원 복도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동주는 한바탕의 소동을 통해 엄마의 기억을 내려놓고 머슴아 같...

목사가 된 전직 고문 기술자

신문 기사 를 읽다 악명 높던 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가 이번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글 바글 끓어 오르는 댓글처럼 내게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영화 <밀양>에서 희생자들의 용서없이 회개만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모든 짐을 내려놓은 납치범의 예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라는 이근안씨에게 충고도 한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근안씨의 이미지는 대개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옮겨온 것이다. 단편소설 <붉은 방>에서 임철우는 피고문자와 고문자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래도 독자는 고문에 괴로워 하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에게 감정입을 하겠지만 입시반인 자식 걱정을 하는 개신교 신자인 고문 기술자의 넋두리를 듣다 보면 그가 갖고 있는 의외의 서민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귀자의 <천마총 가는 길>에서 고문으로 망가진 주인공이, 어느날 가족과 들른 갈비집에서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두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고문자와 맞닥뜨린 상황에서, 마치 옆집 이웃을 만난듯이 대하는 그를 보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공 용의자를 짐승으로 격하시킨 후 행하는 고문들을 그들은 단순한 직업으로 여기며 자신들을 서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포악스러운 고문 기술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 그리고 자식 사랑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수배 생활로 인한 어려움과 옥중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은 아마 서민으로서 생활하던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맡아 주시니 말이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세속적 구원을 늘 바라고 있지 않던가. 누구나 어떻게서든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마음 속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싶어할 것이다. "아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라며 <행복의 나라로>에서 한대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