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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든 천문학자] Gerrit Dou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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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tronomer by Candlelight> Gerrit Dou 미국 로스엔절레스에 있는 게티(Getty) 미술관에 갔을 때 나의 눈을 사로 잡은 그림이다. 밤에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스탠드의 불빛에서 눈길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그림처럼 물건들의 윤곽이 어슴프레 드러났더랬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내겐 학문의 낭만 같은 것이 있었다. 주변과 담을 쌓은 채 적막감속에서 책을 읽으며 기쁨을 찾는 중세 학자들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계산을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지가 바뀌었다. 수학뿐 아니라 어떤 학문을 하던지 어느 수준부터는 믿고 의지할 사람은 자신뿐이란 것을 깨닫는 시간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진도가 안나가는 논문을 붙들고 한숨 짓고 있을때였다. 그 때 외로움이 예전의 이미지에 덧칠이 되었다. 책갈피용으로 파는 조그만 복사본을 사서 조교실 문 앞에 붙여 놓았더랬다. 책상에 앉아 있다 잠깐 고개를 들어 보면 그림은 언제나 두가지 감정을 번갈아 환기 시켜주었다. 낭만과 외로움. 그림에는 두 감정들이 묘사되어 있었고 어둠속에서 촛불의 빛에 드러난 실루엣들은 그것들을 꾸며주는 장식들처럼 보였다.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나의 인상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받게된 인상은 프랑스 철학에서 오용되고 있다고 비난받는 과학 용어들이 실제로 과학에서 쓰는 용도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전에 디씨에서 오갔던 설전에서 도올이 엔트로피의 개념을 이상한 맥락에서 쓴다는 비판과 거의 비슷한 경우 같다.  생명 현상이 다른 어떤 물리 현상과 다름을 주장하기 위해 도올이 엔트로피를 가져다 이야기 한 듯 싶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명 현상을 철학적인 틀에서 이해를 하려 했던 것이고 엔트로피는 그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예중의 하나로 끌어다 쓴 것일게다. 그가 주장하던 형이상학의 개념은 생명 현상을 포함하는 큰 범주였던 듯 싶고 화이트헤드쪽으로도 책을 번역하셨으니 유기체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상황이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과학의 커다란 성공은 일종의 권위를 획득했고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권위에 눌려서 관심을 돌리거나 혹은 다른 권위, 즉 종교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는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일들. 두번째는 비전문가이지만 전문적 연구의 경험을 가지며 이로인해 권위에 대한 굴복 보다는 자신만의 이해를 도모하는 인문학의 연구자들. 세번째는 사회적인 영향력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영향력으로 과학의 권위를 인식하며 과학 연구에 몸담고 있는 당사자들.  두번째의 경우가 지금 생각해 봐야 할 경우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필요하지 않은 곳에 과학의 개념들을 가져다 쓸까? 가령 크리스테바가 시를 설명하기 위해 집합론을 언급한 것 처럼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수학의 명징성(혹은 권위)을 빌리기 위해. 두번째는 어떤 도구보다도 수학적 개념 혹은 단어가 적확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즉 비평에 필요한 새로운 도구로써의 유용함이다. 비호의적인 추측을 하나 더하자면 그냥 뭔가 있어 보이려 가져가 쓴다는 것이다. 사실 별로 도움이 되는 추측은 아니다. 생산적이 논의를 위해서라...